"전쟁은 전선기자 '패션쇼' 무대 아니다"

[인터뷰]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16년간 기록 책으로 펴내

등록 2004.12.30 05:01수정 2005.01.02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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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서점가에는 의미있는 책 한 권이 선보였다. <전선기자 정문태 취재 16년의 기록>(한겨레신문사 발행)이 그것이다.

"동료의식이 아니라 고발자 입장으로 썼다"


정문태 기자는 책에서 군대를 따라다니는 종군기자가 아닌 '시민의 눈'으로 분쟁현장을 감시해온 전선기자로서 경험을 진솔하게 드러냈다. <오마이뉴스>는 책에 다 담기지 못한 저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자 태국에 머물고 있는 정 기자에게 최근 서면 인터뷰를 요청했다.

<전선취재 16년의 기록> 저자 정문태 기자
<전선취재 16년의 기록> 저자 정문태 기자한겨레신문사 제공
정 기자는 인터뷰에서 "전선기자들에 대한 동료 의식이 아니라 고발자 입장으로 썼다"고 말한다. "전쟁은 종군기자들이 화장하고 나설 만한 패션쇼 무대가 아닌데도, 종군기자에 눈길이 쏠리다보니 '주인공'인 전쟁 자체가 뒤로 밀려나는 데"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계기로 전선기자라는 흔치 않은 길을 걷게 된 것일까? 정 기자는 "외신기자로서 정치판을 취재하다보니 '저절로' 전쟁터에 오르게 됐다"고 밝혔다. '힘없는 쪽', '공격당하는 쪽', '소외된 쪽', '언론으로부터 버림받은 쪽' 같은 기준을 놓고 취재영역을 결정하다 보니, 자연스레 늘 전쟁터가 취재공간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오른 전쟁터에서 저자는 미얀마의 산악 정글을 누비는 혁명군과 함께 고민하고 타밀해방타이거의 여성 전사들에게 경외감을 느끼며, 내전에 고통받는 아프간 시민들의 아픔을 함께 했다. 이를 바탕으로 정 기자는 "어떤 집단이든 무장할 권리가 있다"며 "누구도 시민 5만 명이 학살당하는 역사 앞에서 평화만 강요할 권리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렇다고 이른바 저항세력들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도 시민을 살상한 권리는 없다"고 운을 뗀 정 기자는 "저항세력들이 시민을 살해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며, 그런 상황을 놓고 저항세력이라고 무조건 '편애'한 적도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전장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사선을 넘나들고 '정치적 중립'이라는 방패막이마저 던져버리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일까? 정 기자는 "시민에게 충성하는 생각"이라고 분명하게 답했다.


이와 관련 정 기자는 지난 8월 자이툰 부대를 '도둑 파병'할 때 한국 언론이 국방부의 포괄적 엠바고를 순순히 받아들인 것에 대해 '부도덕한 일'이라고 질타했다. "책 때문에 고민하다 한 3년쯤 제대로 현장 취재를 못 했다"는 정 기자는 곧 다시 현장으로 갈 계획이다. (이라크를 포함해) 세계 전체 분쟁지역을 연속 취재하는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는 그의 다음 행보가 벌써 궁금하다.

다음은 정문태 기자와의 서면 인터뷰 전문이다.


- 어떻게 전선기자가 됐나.
"본디 '결심한' 또는 '준비한' 전선기자로 출발한 게 아니라 외신기자로서 정치판을 취재하다보니 저절로 전쟁터에 오르게 된 경우다. 가장 극단적인 정치행위가 전쟁으로 드러난다는 매우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던 셈이다."

- 전선에 선 계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예컨대 1988년 '랭군의 봄'이라는 민주화투쟁이 버마에서 벌어졌는데 유혈진압에 쫓긴 청년, 학생들이 국경으로 빠져나가 군사독재 타도를 외치며 무장항쟁에 돌입했다. 충돌하는 버마 정치 현실에서, 한 쪽은 랭군의 군인들이고 다른 한쪽은 국경 산악밀림으로 빠져나간 민주화 세력이다. 버마 정치를 취재하는 기자로서 어느 쪽을 취재할 것인가를 판단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과정 속에서 난 몇 가지 기준을 정했다. 이를테면, '소수 쪽', '힘없는 쪽', '공격당하는 쪽', '소외된 쪽', '언론으로부터 버림받은 쪽'. 그런 기준에 따라 취재영역을 결정하다 보니 자연스레 늘 전쟁터가 취재공간이 됐다. 이게 전선에 오르게 된 동기이고 과정이고 결과다."

- 서문에서 책을 낼 지 매우 망설였다고 고백했다. 망설임 끝에 내놓은 책이 한국에서 어떻게 읽히길 바라는가.
"책이 어떻게 읽히기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 같고, 다만 독자들이 앞으로는 전선기자(종군기자라고 불려온)들에게 속지 말았으면 한다. 전쟁은 전선기자들의 '패션쇼' 무대가 아니다. 전선기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독자들이 그것에 넋을 잃었다면, 그 전쟁보도는 이미 실패한 거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이런 책을 써야 할 지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전선기자들에 대한 '동료의식'이 아니라 '고발자' 입장으로 이 책을 썼다."

- '인도주의적 개입'이 강대국의 침략을 포장하는 명분이라 주장했다. 약소국의 주권 존중과 인권보호에 대한 당신 생각에서 충돌은 없는가.
"어떤 충돌? 주권과 인권은 동등한 개념이다. 인권보호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주권존중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화두다."

"시민을 살상한 당사자는 강대국·지배층... 학살주범 밝히는 게 더 중요

- 분쟁 지역에 대한 국제사회의 개입에 동의하는 것인가.
"난 개인적으로 국제사회의 분쟁 개입을 부정한 적이 없다. 개입 주체와 목적과 시기 같은 조건들이 명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을 뿐이다."

- 독립 전 동티모르 같은 경우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 그 경우 국제사회가 개입 시기를 놓친 게 결정적이었다. 난 강력한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을 기사에서 누구보다 빨리 강조했다. 국민투표에서 독립이 결정되는 즉시 반대파 민병대가 동티모르를 불바다로 만들 것임을 모든 이들이 예고했는데도 국제사회는 비무장 경찰만 보냈을 뿐이다. 상황을 초동단계에 장악했어야 할 유엔 평화유지군은 동티모르가 불바다가 되고 수많은 이들이 살해당한 뒤에야 파견됐다."

- 동티모르 말고 다른 경우도 그런가.
"수단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 동안 끌어온 분쟁에 국제사회는 그 동안 눈길 한번 제대로 준 적 없다. 의지가 있었다면 분쟁 하나 조정 못 했겠는가? 오히려 양쪽 분쟁 당사자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팔아먹은 게 국제 사회의 현실 아닌가?

유고 경우는 미국과 유럽이 분쟁 중재자로 개입한 게 아니다. 부도덕한 침략전쟁이자 유엔 결정도 없는 가운데 이루어진 범죄행위였을 뿐이다. 당시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란 자가 '보스니아계가 알바니아계 시민 50만 명을 학살했다'며 유고를 공격했지만, 이후 유고 전범재판에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 있나? 그건 거짓말이었다."

- 삶에 대한 발언권을 박탈당한 저항세력에게 '무장할 권리'가 있다고 했지만, 민간인을 살상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며 저항 세력을 비판하는 지적도 있다.
"그런 지적에 전혀 '감동'받지 않는다. 난 누군가에게 시민을 살상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고,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다. 현실에서 시민을 살상해 온 당사자들은 강대국이고 지배층이지만, 저항세력들도 시민을 살해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런 상황에서 저항세력이라고 무조건 '편애'한 적도 없다. 단지 팔레스타인이나 스리랑카의 타밀타이거처럼 일방적으로 왜곡당한 경우 '정중하게' 그이들 뜻도 귀담아 들어줘야 한다는 의견을 말했던 것뿐이다."

"기자에게 정치라는 대상은 모조리 '적'"

-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저항 세력들에게 완벽한 '도덕성'을 요구하기 전에, 과연 누가 시민학살의 주범인가를 밝히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예컨대, 미국의 제1차 이라크 침공(1991년)에서부터 제2차 이라크침공(2003년) 전까지, 국제사회의 대 이라크 봉쇄로 100만 명에 이르는 이라크 아이들이 죽어나갈 때는 아무도 입도 뻥긋 안 했다. 그러다 9.11 공격으로 2500여 명에 이르는 미국 사람들이 죽자 온 세상이 난리를 피웠다. 굶어죽은 이라크 아이도, 빌딩에 깔려죽은 미국 사람들도 모두 똑같이 귀중한 생명인데도 현실에서는 그 생명들이 똑같이 소중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 '정치적 중립'이라는 기자사회의 윤리에 대해 회의적인 것 같다.
"그런 화두에 관심이 없다. 기자라는 직업이 정치와 '전면적'으로 충돌하는 '적대적'인 도구여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기자에게 '정치'라는 대상은 모조리 '적'이다. 정치적 중립이 모든 '적'을 감시해야 한다는 의미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어중간한 지점에 서서 적당히 절충하는 중립은 제도교육이 만들어낸, 지배논리에 충성하는 언론관이다. 그런 '정치적 중립'을 달리 표현하면 상업주의가 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선정적인 뉴스거리를 찾아 전장으로 몰려드는 기자들이 많은 현실에서 '시민에게 충성한다'는 취재 원칙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건 전선기자의 명예라고 여겨왔다. 그 명예가 전선을 뛰는 동력이라고 믿어왔다. 너무 피상적인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뒤에는 내 기사를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고 시민이 있다는 믿음에서부터 비롯된 거다. 기자에게 그 가상의 독자들보다 더 큰 힘이 있겠나? 그래서 내게 그런 힘과 명예를 주는 시민들에게 충성하자는 생각을 해왔던 거다."

- 전선 기자가 아닐 때 자신의 삶을 드러내 독자와 더 깊이 있게 교감할 의향은 없나.
"독자와 교감하는 방식엔 여러 가지가 있다. 일상을 드러내면서 교통하는 방식도 그 중 하나다. 그러나 이번 책에서는 전선이라는 현장과 독자 사이의 다리 노릇을 하는 게 내 뜻이었다. 독자들이 나를 밟고 전선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거기에 내가 지나치게 등장하는 건 비싼 종이를 버리는 낭비다. 난 독자들이 책을 통해 '나'를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면 이미 축복 받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전선기자가 아닌 정문태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 지난 8월 정부는 장병 안전을 명분으로 ‘도둑 파병’이란 비난을 받을 정도로 조용히 자이툰 부대를 이라크에 파병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한마디로 부도덕했다. 숨어서 파병해야 할 만큼 이번 사안에 정당성이 없다는 걸 정부도 군도 모두 자백한 사건이었다. 베트남전 파병 때처럼 북 치고 장구 치며 떠들어댄 짓도 한심하지만, '장병 안전'을 명분으로 보도통제를 요구한 짓도 처량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 '장병 안전'이 중요했다면, 전쟁터로 군인을 보내지 말아야지."

- 당시 정부의 엠바고 요구를 몇몇 인터넷 언론을 제외한 대부분의 매체가 받아들였다.
"엠바고를 수용할지 여부는 취재기자나 언론사가 판단할 부분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엔 엠바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옳았다. 시민들은 자신들 세금으로 전장에 보내는 군대를 확인할 권리가 있고, 군대 출국 사실이 장병들에게 치명적인 위협 요인이 있어 반드시 보안을 걸어야 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라크 저항세력들이 한국군 통과 지점을 좇아 외국 영공에서 원정공격을 감행할 만한 무기체계나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 재선에 성공한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 강화'를 천명했다. 향후 취재 계획(특히 한국군이 파견된 이라크 취재 가능성)은 어떤가.
"책 때문에 고민하다 한 3년쯤 제대로 현장 취재를 못했다. 이제 다시 현장으로 가야겠는데, 아직 정확한 취재 일정들이 나온 상태는 아니다. 2∼3년쯤 잡고 세계 전체 분쟁지역을 연속 취재하는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 이라크도 다시 갈 것이다."

- <오마이뉴스>도 시민이야말로 언론의 궁극적 충성 대상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없는가.
"<오마이뉴스>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다. 시민사회에 대한 믿음의 상징으로 <오마이뉴스>가 쑥쑥 자라나기를 빌겠다."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기록

정문태 지음,
푸른숲,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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