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쪽방촌 혜선이 "새 집에서 살고 싶어요"

세밑 강제철거로 집이 헐린 뒤 오갈데 없어...네티즌 온정 봇물

등록 2005.01.01 14:32수정 2005.01.25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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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세호(왼쪽)와 혜선이. 두 남매는 어제 오늘 방송과 신문 등 여러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다

세호(왼쪽)와 혜선이. 두 남매는 어제 오늘 방송과 신문 등 여러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다 ⓒ 석희열

"할머니를 닮고 싶어요. 새로 지은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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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보] 용산쪽방 혜선이 남매, 불우한 처지 아니다?

12월 29일 법원의 강제집행으로 길거리로 내몰린 세호(11)와 혜선(9)이의 새해 소망은 예전처럼 할머니와 함께 오순도순 사는 것이다. 할머니 김옥순(68)씨는 지난해 11월 19일 용산구청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로 머리와 허리를 다쳐 용산의 한 외과병원에 입원 중이다.

두 남매는 외환 위기 직후인 98년 엄마 아빠가 집을 나가면서 할머니 김씨에게 맡겨졌다. 이들 세 식구의 보금자리는 서울 용산5가동 19번지 4평 남짓 단칸 쪽방. 하지만 이 단칸 쪽방마저 지난 29일 용역 철거반에 의해 헐리면서 어린 남매는 길거리로 나앉게 됐다.

오갈 데가 없게 된 이들 남매는 지난 29일부터 할머니가 입원하고 있는 용산외과 병실 보조 침대에서 새우잠을 자며 할머니를 보살피고 있다. 1일 오전 용산외과 병실에서 세호·혜선이 남매를 만났다.

병실에 들어서자 세호는 음료수를 건네며 반갑게 인사했다. 29일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집안 곳곳에 뻥 뚫린 구멍을 보며 엉엉 울음을 터뜨리던 혜선이도 기자를 보자 달려나오며 품에 안겼다.

"할머니가 너무 편찮으셔서 저는 할머니 걱정만 해요. 할머니를 닮고 싶어요. 저에게 밥도 해 주고, 반찬도 해 주고, 방에 불도 넣어 주고, 우산도 사 주고, 교회도 보내 주는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로 좋아요. 그래서 커서 돈을 벌면 할머니에게 다 드릴 거예요."

허리 통증이 심한 할머니를 연신 안마하며 돌보던 세호도 "저도 할머니가 제일로 좋아요"라며 거들었다. 두 남매에게는 당장 돌아갈 집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새 학기가 시작되어 학교 갈 걱정도 태산이다. 지난번 명도집행 때 철거반이 이들의 교과서도 모조리 쓸어 갔기 때문이다.


"축구공도 없어지고, 앉은뱅이 책상과 며칠 전에 새로 받은 교과서도 없어졌어요. 티브이와 냉장고, 세탁기도 없어지고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요. 나무 막대기만 있었어요. 아저씨들이 테이프로 붙여 갖고 실어가는 걸 학교에서 돌아오다 골목길에서 봤지만 무서워서 아무말도 못했어요."

a 할머니가 허리 통증을 호소하자 두 남매가 할머니의 허리에 파스를 붙여 드리고 있다

할머니가 허리 통증을 호소하자 두 남매가 할머니의 허리에 파스를 붙여 드리고 있다 ⓒ 석희열

쪽방이 헐리던 29일 철거반의 대형 망치 소리에 놀란 혜선이의 전화를 받고 집으로 달려가던 할머니 김씨는 골목 어귀에서 철거반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폭행을 당했다. 퇴원하려고 이날 오전 수속까지 마쳤던 김씨는 결국 다시 입원하는 신세가 됐다. 김씨는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다"고 당시의 끔찍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지난 88년부터 2001년까지 홍익회가 운영하는 용산역 매점에서 김씨가 하루 16시간을 일하고 손에 쥐는 돈은 한달에 20~25만원. 한달에 15만원 하는 방세를 대기는커녕 전기세도 못 내 매번 전기가 끊겨 냉골에서 지내야 했다. 2001년 이후 파출부로 뛰며 두 손주를 돌봐 왔지만 이마저도 2003년 여름부터 철거 대책 일에 전념하면서 그만두었다.

김씨는 만성적인 목앓이에 시달리면서도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목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됐다. 관청에게서 생계 지원이나 건강보험 혜택도 받지 못했다. 혜선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매달 갖다 주는 쌀로 세 식구 끼니를 이었다. 소득이 없다 보니 빚만 눈덩이처럼 불었다.

"내가 살아야 불쌍한 우리 아이들을 거둘 수가 있는데…. 집이 헐리는 바람에 병원에서 나간다 해도 당장 갈 데가 없어 큰 걱정이다. 더군다나 혼자도 아니고 애기들(세호와 혜선이)이 있어 막막하다."

할머니의 이같은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혜선이는 커서 변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다. 세호는 대통령이 되거나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억울한 사람을 도와주고 할머니 병원비와 수술비를 대신 내 주기 위해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할머니와 같이 아파트에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안타깝지만 돈이 없어 새 집으로 가지는 못할 것 같아요." (혜선이)

"우리집을 부순 깡패 같은 나쁜 사람들을 혼내 주기 위해 대통령이 되고 싶어요. 제발 깡패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우리집에도 돈이 좀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할머니가 고생 안하셔도 되잖아요." (세호)

a 31일 오후 수십명의 구청직원들이 달려들어 비닐 천막을 뜯어 버리자 주민들이 울먹이고 있다

31일 오후 수십명의 구청직원들이 달려들어 비닐 천막을 뜯어 버리자 주민들이 울먹이고 있다 ⓒ 용산5가동 철대위

세밑을 울린 세호·혜선이 남매의 딱한 사정이 지난달 30일 <오마이뉴스>를 비롯해 일부 언론을 통해 전해진 뒤 이들 남매를 돕겠다는 온정의 손길이 봇물처럼 밀려들고 있다.

특히 쪽방 소녀 혜선이 기사가 실린 인터넷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는 이틀 만에 3000개에 달하는 댓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용산구청 홈페이지 게시판에도 분노한 네티즌들의 글이 폭주해 한때 홈페이지 접속이 중단되기도 했다.

할머니 김옥순씨의 예금 계좌에는 1일 오후 1시 30분 현재까지 1627명의 네티즌들이 훈훈한 희망의 씨앗을 보내와 모두 5260만 6841원의 성금이 쌓였다.

용산5가동 철거대책위원회 심순자(52) 위원장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나쁜 사람들보다는 따뜻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며 "훈훈한 인정을 보내준 국민들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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