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114회

등록 2005.02.07 07:52수정 2005.02.07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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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벽의 시선이 천천히 돌려져 그의 뒤에 서 있던 삼십대 중반의 사내에게 향했다.

“무옥(武鈺).....! 명륜각(溟輪閣)에 있는 형제들도 데리고 가거라.”


무옥이라 불린 사내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소. 명륜각의 형제들까지 나설 필요도 없소.”

이미 마을 어귀에 와 있는 적랑대를 모두 죽일 준비를 마쳤다. 이미 일이 틀어지면 손을 쓰고자 했기 때문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처리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데리고 가...... 다시 한번 말하건데 한명도 도망치게 하거나 살려두어서는 안돼. 무옥 자네가 일일이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만 할 거야.”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소. 하지만 명륜각의 형제들은...”


“부탁이다. 우리 형제들은 한 사람도 다치거나 죽는 일이 없도록......!”

공손벽의 마음이었다. 이미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을 위하여 키운 살귀(殺鬼)들까지 데리고 가라는 것을 보면 그의 심정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자신과 같은 젊은이들은 촌장인 공손벽이 너무 우유부단하다고 비난한 적이 있었다. 너무 조심스럽고 참는다고 수군거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백가촌을 유지하고 백가촌의 한사람을 전체로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알고부터는 그를 욕할 수 없었다.


무옥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내일 해 뜨고 난 이후에는 적랑대의 단 한명이라도 볼 수 없을 것이오. 또한 적랑대가 왜 이 지상에서 갑자기 사라졌는지 아는 사람도 존재치 않을 것이오.”

공손벽을 향하는 무옥이란 사내의 눈에는 존경심을 담고 있었고, 무옥을 바라보는 공손벽의 눈에는 믿음과 신뢰가 있었다. 무옥이 눈짓과 함께 신형을 날리자 적화와 척탑, 그리고 남은 세명의 인물들이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신형이 어둠 속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공손벽은 몸을 돌렸다.

“보셨습니까?”

그의 등뒤로 어느새 세 노인이 와 있었다.

“자네는...”

“백가촌의 어르신들은 이렇게 이곳을 지켜왔습니다. 참고 또 참고.... 외부에서 이곳의 사람들이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라 알게 되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나라에서 반역도로 잡아들이는 백련교도들이라고 알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공손벽의 말에 세 노인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사냥을 해 연명하면서 척박한 땅을 일구어 놓은 것이다. 더 이상 받아 주지 않는 중원을 등지고 그들은 그들만의 삶을 찾아 정착한 것이다. 그 고생이 어찌하였을까? 자신들만이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고생했다고 생각했던 세 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들을 숨기고...... 모욕과 멸시를 인내하고 또 인내하면서...... 아마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수백명에 불과한 백가촌을 수만에 이르는 마을로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 이곳을 넘나들던 여러 도적떼들이나 비적들이 어느 한순간에 모습을 감춰 버린 것은 이들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참고 또 참다가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을 때 그들은 아무도 모르게 손을 썼을 것이다.

“피가 강을 이루고.... 시신이 산처럼 쌓인 후에 뜻을 이루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또 다시 적을 만들고 혈육을 죽이고, 어제의 형제를 암습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시겠습니까? 주원장도 결국은 자신의 동료들까지 죽이지 않았습니까?”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이 입을 열면 무섭다. 마음속으로 되뇌이던 말이 비수처럼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후손들을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한다면 누구의 후손을 위하는 것입니까? 어르신들... 그리고 그 전대의 어르신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결과 같은 교도들끼리의 반목과 질시... 결국 교(敎)를 빙자해 권력을 잡고자 하지 않았습니까? 주원장이 아닌 어르신들 중 누군가가 명을 세웠어도 주원장과 다르란 법이 있습니까? 이제 와서 세상을 바꾸어 본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미륵께서 하생하셨습니까? 전륜법왕께서 오셨습니까?”

마음에 담았던 의혹이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부친에게 대들 듯했던 질문이었다. 왜... 왜... 우리는 이런 외진 곳에 있어야 하냐고 통곡하듯이 물었던 말이었다. 그 통곡에 부친이나 어르신들이 오히려 자신들에게 물으며 하던 대답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세월이 흘러 이곳의 젊은 사람들의 질문에 자신이 해주어야 할 대답과도 같은 질문들이었다.

“아버님과 이곳을 만든 어르신들의 유명(遺命)이셨습니다. 저는 만인의 행복보다 이 백가촌 사람들의 피 한방울이 더 귀중합니다.”

세 노인은 아무 말 없이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설득하러 왔다가 오히려 설득 당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해했다. 그들 역시 아마 이곳을 만든 형제들의 입장이었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자네의 생각을 잘 알았네..... ”

신주귀안은 고개를 끄떡이며 보이지도 않는 눈을 들어 하늘을 향했다. 아마 해가 진 지 두어시진 지났으니 암천(暗天)에는 하한(河漢, 銀河水)이 흐르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어둠을 가르는 유성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군. 누구나 생각하고 바라는 바가 다르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다는 말은 확실히 옳은 말이야.”

세 노인은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자신들이 무언가 강요한다는 것은 억지였다. 자신들이 죽음과도 같은 세월을 겪어온 동안 이들은 도망가 비겁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들만의 아집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어르신들....”

“아니야.... 괜찮아... 자네를 탓하는게 아니네. 우리가 이곳에 오래 있으면 젊은 아이들이 더 말이 많을 게야. 기회가 되면 다시 놀러 오겠네.....”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노인과 한손밖에 없는 그 손을 잡고 걸어가는 눈이 없는 노인. 그들은 공손벽의 인사를 뒤로 한 채 떠났다.

이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말로 설득한다 할지라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힘이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신주귀안은 포기했다. 자신들이 포기하지 않고 있듯이 이미 포기한 이들은 다시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뭔가 중대한 계기가 있기 전까지는.......

(29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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