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44회(7부 : 타는 목마름으로)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5.04.05 23:32수정 2005.04.0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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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인기 화백 제공
그림 김인기 화백 제공김인기

아 부 지 2

마흔 여덟의 촛불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게 말없이
가난을 쫓아내던


찬바람 막아보려 창호지를 겹겹이 발라보지만
심장을 뚫고 들어오는지
꺼져 가는 심지를 곧추세울 수 없습니다

아직도 여명은 백 리밖에 있건만

횃불을 높이 들어
이 생명 취하시고 아비를 살려 주소서



새벽, 금식, 철야… 그 어떤
기도도 땅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습니다


아 부 지 4


사랑한다고 한 적은 없지만
아니 한 번도 안아준 적도 없지만
당신 몸보다 더 끔찍이 아끼는 줄을 아는 까닭에
눈이 내리면
안개주의보

사랑은 입으로 아니하고 가슴으로 아니하고
영혼으로 다가오는 것
눈이 내리는 날이면 새벽의 섬광으로
마당과 뒤꼍 그리고 고샅 멀리까지 싸리비질
마음을 깔아 놓으셨지요
쇠죽 솥뚜껑으로 데워진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서면
학교에 도착해서도 김이 모락모락
보이지 않는 소리 내지 않는 낮별처럼


당신은 늘 나의 하늘이었습니다


아 부 지 6

'분'은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분을 내가 무지 사랑하는 줄은 익히 알았지만
봉숭아 꽃물처럼 이토록 丹心인 줄은
몰랐습니다

밥을 먹다가도 가끔은
아들 자취방에 막차로 오셨다가
새벽 첫차로 떠나시던 분의 비인 넓은 등이
자꾸만 어른거려
수저를 놓고 맙니다

무거운 쌀가마, 냄새나는 겅거니(반찬), 질질새는 김치 국물
아들을 위해 백 리길을 해마로 오신 분
힘들다는 내색 하나 없었지만 주무실 때 콧숨으로 읽었습니다
그때 아들이 잠을 까맣게 칠한 것은 코고는 소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등이
분의 넓은 비인 등이…



당시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썼던 나의 시편(詩篇)들이다.

한번은 초희가 아버지께서 입원해 있는 목동 R병원으로 병문안을 왔다. 내가 그토록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그녀가 기어이 온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오지 말라고 한 이유는 그녀가 와야 반갑게 맞아줄 아버지가 아니었고, 또한 좋은 소리해서 돌려보낼 아버지도 아니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와야 괜히 긁어 부스럼만 만들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내가 왜 왔느냐고 묻자,

"그래도 아버님이 편찮으시다는데 어떻게 한 번도 안 와볼 수 있어요."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백 번 천 번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것이다. 예상대로 그녀는 좋은 소리도 못 듣고 쫓겨나다시피 했다.

아버지는 그녀를 보자, 아직도 끝난 관계가 아니냐며 나에게 큰소리로 호통까지 치셨다. 그러다가 그만 정신까지 잃고 말았다.

힘들 때면 가끔 나는 목동에 있는 노진의 집을 찾았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R병원과 가깝게 있다보니 자주 가게 되었다. 2월 15일인가.

그 날도 병원에서, 또는 병원 안에 있는 원내 교회에서 밤을 새워가며 아버지를 간호하고 쾌유를 비는 기도를 드렸다. 그래서 너무 피곤한 나머지 노진의 집에 가서 잠깐 눈을 붙이려고 그의 집을 찾았다.

다행히 그가 있었다. 노진은 나를 위해 직접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챙겨주고는 자기 방에서 마음 푹 놓고 한잠 자라고 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눕기 전에 그가 요즘은 무슨 책을 보나 궁금해서 그의 책상 앞에 잠시 앉았다. 나의 책꽂이가 온통 문학과 종교서적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것처럼 그의 책꽂이에는 의학서적들로 가득했다.

왼쪽 구석을 보니 사회과학서적들이 아무렇게나 꽂혀 있었다. 전에는 중앙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그 책들이 이제는 구석으로 밀려나 찬밥 신세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책상 위에는 마침 노트가 하나 있어 무엇인가 열어보았더니 그의 일기장이었다. 덮을까 하다가 언뜻 초희라는 이름이 눈에 띄어 다시 펼쳐보니, 분명 초희에 관한 내용이었다.

놀랍게도 녀석이 초희를 좋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친구의 여자친구이기에 차마 말을 못하고 속병만 앓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얼른 덮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잠이 올 리 만무했다. 나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방에서 나왔다.

"왜 안자고 나와? 잠자리가 불편하냐?"

방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 노진이 그렇게 물었다.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내가 깜박 잊은 게 있어서 빨리 가봐야겠어."

"뭔데 그래. 내가 대신 해줄 게. 왜 내가 대신하면 안 되는 일이야?"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어딘가 모르게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다. 그가 왜 그러냐고 묻는 말에 나는 아마 잠을 못 자서 그런 모양이라고 둘러댔다.

"그러고 보니 네 표정이 무척 어둡다. 왜 무슨 일 있어?"

나는 역시 아버지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녀석이 초희를 좋아하고 있었다니 너무나 의외였고 충격이었다.

덧붙이는 글 |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늘 감사드립니다. 45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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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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