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인간' 테리, 그녀의 마지막 밤은 이랬다

[현지보도] 언론과 시위대가 점령한 사망 전날 요양원 풍경

등록 2005.04.01 15:31수정 2005.04.01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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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톨릭 신부가 '눈먼 정의' '눈먼 판사'라는 글귀를 쓴 안경을 쓰고 시위하고 있다. ⓒ 김명곤

지난 18일 이후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안락사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테리 시아보. 법원의 명령으로 그녀에게 급식관이 제거된 지 13일째인 지난 3월 30일 오후 6시경 기자는 테리가 죽어가고 있는 플로리다 서부 해안 도시인 피날레스 파크의 우드사이드 요양원을 찾았다.

이날 테리의 부모는 경각에 달린 딸의 목숨을 구하고자 연방 대법원에 다시 재심 청원서를 냈으나 결국 거부되어 마지막 희망도 희미해졌다.

"교황에게 준 물, 테리에게도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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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가 테리의 급식튜브를 제거케한 사람들을 지칭한 '살인자'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 김명곤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맥도날드 햄버거점은 이미 각지에서 몰려든 시위대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맥도날드 주차장에 세워둔 테네시 플레이트를 단 밴의 창문에는 흰색 페인트로 "교황에게 준 물을 테리에게도 주어라"는 글귀가 써 있었다. 최근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병세가 악화되어 급식을 하고 있는 것을 빗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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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인간 테리 시아보를 살려라"

기자가 우드사이드 요양원 앞에 도착했을 때는, 바로 전날 테리의 급식관 재삽입을 촉구하기 위해 젭 부시 주지사를 만나기도 했던 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제시 잭슨 목사가 요양원을 방문하고 막 떠나려던 참이었다.

요양원 앞 경찰 보호선 밖에 서있던 시위대들은 "댕큐, 제시" "떠나지 마십시오, 제시"라며 차에 올라탄 잭슨 목사를 향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러자 제시는 잠시 차를 멈추고 창 밖으로 격려의 손짓을 하기도 했다. 최근 며칠 동안 제시 잭슨은 방송에서 테리 시아보의 부모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발언을 했고, 테리 부모의 요청에 의해 전날 플로리다로 날아 왔던 터였다.

요양원 앞 잔디 밟자 경찰 "물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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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원 여성이 젭부시 플로리다 주지사에게 '테리를 살려달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 김명곤

요양원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나 40여명의 경찰들이 곳곳에 깔려 통제하고 있었다.

요양원 바로 길 건너에는 미국은 물론 세계 각 지역에서 몰려든 취재진들이 24시간 취재를 위해 임시 막사와 송신탑을 세우고 각종 취재 장비들을 준비한 채 대기중이었다. 카메라맨 앞에 선 앵커들이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수시로 보도하고 있는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요양원 앞 보도 안쪽으로는 울타리가 둘러처져 있었으며 경찰들은 그곳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일반인들에 대해 통제를 가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철저한 통제였다. 심지어는 기자가 사진을 찍기 위해 뒷걸음을 치다 요양원 담 밖으로 나 있는 잔디를 밟자 경찰이 다가와 "물러나라(Keep out!)"고 제지할 정도였다.

왕복 4차선 도로의 양쪽에는 피켓 시위자들, 트럼펫을 불고 있는 사람, 북을 치고 있는 사람, 핸드폰을 들고 외치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었다. 줄잡아 400여명은 되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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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시위대원 부부가 고뇌에 찬 모습으로 기도하고 있는 모습. ⓒ 김명곤

약 100여명의 가톨릭 신자들은 아예 한 지역을 점령하고 성모 마리아상과 그림, 촛불 단상을 설치해 두고 계속 기도하며 묵주를 굴리고 있었다. 이곳에는 유모차를 끌고 온 가정주부, 배낭을 맨 초등학생들, 휠체어를 탄 병약자 및 노약자 등이 아예 자리를 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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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원이 '테리의 심장이 뛰는 소리'라며 북을 두들기고 있다. ⓒ 김명곤

트럼펫을 부는 남자는 테리의 병상이 있는 요양원을 향해 끊임없이 찬송가를 연주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왔다는 한 남자는 테리의 심장 박동이 계속 이어지라는 뜻에서 끊임없이 북을 두드리고 있다고 밝혔다.

피켓도 가지가지였다. '살인자들' '법적인 것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눈먼 정의, 눈먼 재판관' '그녀는 정상적인 장애자' '누가 하나님 편인가'라는 내용 등이 적힌 피켓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한 할아버지는 기자에게 다가오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는 "부끄럽다. 이게 미국의 현실이다"고 말하고는 "제발, 진실을 보도해 달라"고 외쳤다.

한 남성은 핸드폰을 입에 대고 "여러분, 주목해 주십시오"라고 반복해 말하고는 "우리 주변은 미디어맨들에 의해 시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아슬아슬한 '서커스'를 구경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저 안에서는 한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엄숙한 순간입니다"라며 '시아보 케이스'가 호기심으로 흐르는 듯한 분위기를 경계했다.

'물 한컵 주세요' 현장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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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에게 물을 주라'며 물컵을 들고 호소했던 한 남성이 체포되어 호송되고 있다. 뒤에 보이는 건물이 테리 시아보가 입원해 있는 우드사이드 호스피스 병동. ⓒ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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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우선' 단체 시위대원이 요양원앞을 지키고 있는 경찰들 앞에서 무릎을 꿇은채 '테리에게 물을 주라'며 호소하고 있다. 이 남성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호송되었다. ⓒ 김명곤

그의 이같은 호소가 계속되는 가운데, 갑자기 이곳저곳에서 시위자들을 찍고 있던 카메라맨들이 요양원 정문으로 몰려갔다. 여섯명의 경찰 사이로 한 남성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보였다. 등 뒤에 '프로 라이프(생명 우선)'라고 인쇄된 티셔츠를 입은 그 남성은 손에 든 물 한컵을 치켜든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위 시위대들 속에서 "댕큐 브라더!(Thank you, brother!)" "오, 용감한 사람!(Oh, brave man)"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경찰은 시위대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듯 남자의 손에 들린 물컵을 조용히 받아 땅에 내려 놓더니 이내 남자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몇 발자국 뒤에 주차되어 있는 경찰 호송차 쪽으로 데려갔다. 경찰은 그 남성의 바지 혁대끈을 풀어 내고 발에 쇠사슬을 채우더니 차에 태웠다. 그는 이날 테리에게 물을 주라고 요청하다 체포된 15번째 사람이었다.

해가 점점 저물며 어두워가던 오후 6시 30분경, 취재진들은 잰걸음으로 요양원 정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테리 시아보의 아버지 밥 쉰들러가 그의 조언자인 프랭크 파본 신부와 함께 요양원 정문을 향하고 있었다. 테리의 어머니 메리 쉰들러는 지친 탓인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전날 언론을 통해 사위인 마이클 시아보에게 "당신도 애지중지하는 딸이 있고, 나에게도 사랑하는 딸이 있다. 나에게 딸을 돌려 달라"고 하소연했다. 마이클 시아보 측은 묵묵무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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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시아보의 아버지 밥 쉰들러가 요양원 앞에서 기자들에 둘러싸여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김명곤

테리의 아버지는 수시간 전에 연방법원이 6번째로 테리 시아보 사건에 대한 재심을 거부한 데 대한 의견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지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반응 없이 요양원 안으로 들어 갔다.

요양원 정문 앞 한쪽에는 이미 기자회견을 예측한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이 준비를 갖추고 모여들었다. 근 50여분이 지난 7시 30분경 딸을 면회한 쉰들러가 요양원을 나와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갔다.

노랑색 끈으로 울타리를 쳐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한 임시 회견장에서 쉰들러 곁에 선 프랭크 신부는 바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연방법원의 기각 사실을 알리고 테리 측이 다시 연방대법원에 청원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쉰들러는 미소 띤 얼굴로 기자들에게 "딸의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좋다"고 전했으며 주변에 몰려든 시위대들에게는 "댕큐"라고 말했다.

이후 쉰들러 일행은 카메라맨들을 헤치며 임시장소인 듯한 길건너 선물센터로 들어가 버렸고 경호원들이 건물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의 뒤를 쫓던 기자가 뒤돌아서 가고 있는데 한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동양에서 온 기자는 처음 본다"며 미국에서 낙태 반대를 위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오퍼레이션 레스큐'라는 인권단체의 창시자이자 현재 테리 부모의 대변인 렌달 테리의 비서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렌달 테리 비서 "테리 상태 왜곡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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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우선' 단체 대원들이 길거리에 앉아 악기를 연주하며 시위하고 있다. ⓒ 김명곤

그녀는 기자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요양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마이클 시아보측의 변호사가 테리가 입원해 있는 요양원의 '법정 관리인'이라며 "그들은 한 통속"이리고 비난했다. 그녀는 "테리가 유아가 사용하는 우유병을 혼자 잡을 수 있고, 음식도 스스로 삼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플로리다법에 따라 그녀에게 급식관이 제공되어 왔다"면서 테리의 상태가 마이클과 요양원 측에 의해 왜곡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그녀와 말을 주고 받고 있던 중 기자는 마침 테리의 친동생인 수잔 비타나모가 아버지가 들어가 있던 선물가게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다가가 "언니의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는 "저쪽(마이클 시아보와 요양원 측)에서 말해 주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면서 어두운 얼굴로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아버지와는 달리 언니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는 듯했다.

시간이 밤 10시를 이미 넘어섰는데도 돌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쉴 새 없이 계속 울려대는 북 소리와 트럼펫 소리, 기도하는 소리, 바삐 돌아가는 카메라 소리들이 테리의 요양원 밖을 채우고 있었다. 밖의 이같은 소란에도 불구하고 테리가 들어 있는 요양원은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테리는 기자가 자리를 뜬 지 11시간이 지난 다음날 3월 31일 오전 9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덧붙이는 글 | koreaweeklyfl.com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koreaweeklyfl.com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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