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석불의 엇갈린 전설

맘 가는대로 떠나는 고창여행(3)-도솔암 내원궁

등록 2005.05.09 06:55수정 2005.05.09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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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도솔천 내원궁 입구

도솔천 내원궁 입구 ⓒ 김정은

도솔천 내원궁이라 써붙인 현판 위 108 바위계단에는 때마침 얼마 남지 않은 석가탄신일을 기리는 화려한 색깔의 종이등이 바람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며 기암절벽 사이에 들어선 내원궁까지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바람따라 흔들리며 늘어선 색색가지 종이등

꽃과 같이 아름다운 등의 행렬을 따라 바위계단을 천천히 오르노라니 순간 이 길이 조그만 암자로 오르는 길이 아니라 정말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살고 있다는 상상 속의 도솔천 내원궁으로 오르는 길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져 버렸다.


그만큼 내원궁에서 바라본 푸근하고 그윽한 선운산의 산세는 일품이다. 특히 하늘을 향해 한껏 입을 벌린 채 포효하는 듯한 천마봉의 기묘한 장엄미는 그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매력을 지녔다. 얼핏 보면 동학농민운동의 발원지답게 둥글둥글 소박하지만 마음 속에는 순수한 정열을 품고 있는 고창 사람들을 닮은 것도 같다.

a 바람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며 내원궁까지 줄지어 늘어서 있는 종이등

바람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며 내원궁까지 줄지어 늘어서 있는 종이등 ⓒ 김정은

a 내원궁에서 바라본 선운산

내원궁에서 바라본 선운산 ⓒ 김정은

도솔촌 내원궁이라는 의미에서 보듯 이곳 선운사에서는 백제에서부터 지금까지 민중을 통해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내려오는 미륵사상의 흔적을 이곳저곳에서 느낄 수 있다. 백제의 미륵사상의 특징은 바로 '구원'이다. 미륵부처가 이생으로 내려오면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구원하고 현실적인 생활고까지 해결되는 지상 낙원이 이루어진다는 그 원초적인 의미의 구원. 백제의 미륵사상은 세월이 흘러가고 점점 세상이 살기 힘들어질수록 민중 속에 촘촘히 파고들어 소박한 민중의식을 일깨우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마애불과 미륵신앙

a 도솔암 가는 길 옆에 서있는 이름 모를 미륵불. 둥글둥글 소박하지만 순수한 정열을 품고 있는 고창 사람들을 닮은 것도 같다.

도솔암 가는 길 옆에 서있는 이름 모를 미륵불. 둥글둥글 소박하지만 순수한 정열을 품고 있는 고창 사람들을 닮은 것도 같다. ⓒ 김정은

미륵신앙과 민중의식과의 상관관계는 내원궁 서편의 거대한 암벽인 동불암(칠송대)에 새겨진 마애불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선운사 창건 설화와 관련하여 진흥왕과 함께 잘 알려진 검단선사가 만든 미륵불 또는 검단선사의 진상이라고 추측되는 17m 높이의 마애불에는 예로부터 전설 하나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선운사 석불 배꼽에는 검단선사의 신비한 비결록이 숨겨져 있어서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하는데, 비결과 함께 벼락살도 들어있으므로 거기에 손을 대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것이다. 1820년 전라감사 이서구가 소문을 듣고 마애불을 찾아와 돌출부의 뚜껑을 열었더니 그 안 문서에는 '이서구가 열어 보고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갑자기 뇌성벽력이 몰아치기 시작하자 깜짝 놀란 이서구는 두려움에 책을 도로 넣고 봉했다고 한다.


세월은 흘러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전 동학 접주 손화중 집에서는 그 비결을 꺼내보자는 말이 나왔다. 모두들 벼락살을 걱정했지만 이서구가 열었을 때 이미 벼락이 쳤으므로 벼락살은 없어졌다는 말에 동학도들은 대나무를 엮어서 발판을 만들어 올라가 석불 배꼽을 깨고 비결을 가져갔다고 한다. 이 일로 각지의 동학군 수백 명이 무장현감에게 잡혀 들어가, 가져간 비결을 내놓고 두령이 있는 곳을 대라며 취조 당했다고 한다.

미완의 꿈으로 남은 동학농민혁명


a 동불암 마애석불

동불암 마애석불 ⓒ 김정은

전라감사 이서구와 동학과 관련된 이 이야기가 정말 역사적인 사실인지 아니면 민간에서 떠도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실제 동학접주 손화중이 비결을 가져갔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 수만명의 교도들이 손화중의 밑으로 들어 왔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따라서 마애불 이야기는 민중봉기를 통한 후천개벽을 의미하는 미륵신앙적인 색채가 강해 보인다.

검단선사의 비결록이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것은 곧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는 다분히 후천개벽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신기한 비결을 입수한 사람은 후천개벽을 위해 선택 받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하필이면 동학농민운동의 주도자 중 한명인 손화중이었다는, 짜맞춘 듯한 결말에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실제 1894년 '창의문' 선포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불을 당긴 현장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무장 '여시뫼'였던 것을 보면 이곳 고창에는 전설과 역사가 기묘하게 조화된 특이한 고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실제 동학농민혁명의 실세이자 검단선사의 신비한 비결록을 얻었다는 손화중이나 녹두장군 전봉준은 전설상 짜맞춰진 선택 받은 사람답지 않게 일본군에 잡혀 죽음을 당함으로써 참혹하게 생을 마쳤다.

반면 동학농민혁명의 원흉인 탐관 오리 조병갑은 아이러니하게도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4년 뒤에는 고등 재판소 판사로 복귀해, 1898년에는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내리는 등 계속 떵떵거리며 살았다고 한다. 또다른 탐관오리 이용태 또한 1899년에 평리원 재판장으로 다시 벼슬자리에 올라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밑에서 교육부 장관으로 출세했고, 1910년 한일합방 뒤에는 일본 정부가 내리는 자작 작위를 받으면서 부유한 삶을 살았다.

이쯤 되면 비결록이나 전설과는 180도 다른 현실에 기운이 빠져 버린다. '권선징악'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지경이니 그렇다면 변혁을 꿈꾸던 민중의 꿈은 실패한 혁명 속에서 이대로 처절하게 부서진 것일까?

時來天下皆同力(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
運去英雄不自謀 (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
愛國丹心誰有知 (애국의 뜨거운 마음 그 누가 알리)

殞 命(운명)/전봉준 유시


비록 그들의 혁명은 아쉽게 실패로 끝났지만 혁명 속 꿈틀거렸던 미완의 꿈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형태로 여전히 살아 남아 새로운 변화를 꿈꾸고 있다.

2005년 봄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있는 전설의 현장과 그 현장을 늘 지켜왔던 육중한 마애석불은 이렇게 미완의 안타까움과 새로운 희망을 간직한 채 아무 일 없는 듯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리고 선운사를 떠나는 마음은 어느새 그네들의 본거지인 무장읍성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맘 가는대로 떠나는 고창여행 세번째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맘 가는대로 떠나는 고창여행 세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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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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