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안들면 원님도 왕따!

맘가는 대로 떠난 고창여행(4)-무장읍성

등록 2005.05.16 01:53수정 2005.05.16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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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무장읍성의 남문인 진무루

무장읍성의 남문인 진무루 ⓒ 김정은

동학정신의 중요 발상지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위치한 무장읍성(사적 제346호)은 동학혁명의 중심에 위치한 지역임에도 비교적 온전한 성곽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그 이유는 이곳이 바로 1894년 '창의문' 선포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농민들의 아지트였기 때문이다.


<무장읍지>에 따르면 1417년(조선 태종17년)에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이 통합되어 '무장진'(茂長鎭)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곳이 해안가와 가까운 전략적인 요충지라는 점에 착안, 병마사 김저래가 백성 2만여명을 동원해 성을 완성시켰다고 한다.

a 줄지어 늘어서있는 선정비 , 원님들의 전시행정의표본인가, 아전들의 위로비인가?

줄지어 늘어서있는 선정비 , 원님들의 전시행정의표본인가, 아전들의 위로비인가? ⓒ 김정은

그러나 지금은 이 읍성의 남문 역할을 하는 누각에 鎭茂樓(진무루)라고 위풍당당하게 쓴 현판만이 무장읍성의 존재를 증명할 뿐 사람 구경하기도 힘들 만큼 한적한 곳이 되어버렸다.

진무루와 시간의 계단

그리 넓지 않은 계단을 천천히 오르노라니 마치 시간의 계단을 올라 과거 역사의 현장으로 거슬러가는 느낌이 든다. 이곳을 오르면 혹시 구한말 격변기, 선운사 석불 내 <검단선사의 비기>를 손화중 접주가 입수했다는 소문을 듣고 동학혁명을 모의하러 비밀리에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나를 반긴 건 주인 없는 황량한 공터와 옆으로 아무렇게나 늘어서 있는 비석군들이었다.


그 비석의 용도야 예전 진도의 남도석성 입구에서 익히 보아왔듯 역대 이곳 수령의 선정비들이다. 선정이라. 정말 저 돌덩어리의 숫자만큼 불쌍한 백성들을 가엽게 여겨 선정을 베푸신 나리님(?)들이 많았다면 이곳 백성들이 왜 못살겠다고 바꿔보자며 곡괭이와 낫을 들고 일어났을까?

a 무장객사, 궐패를 모시는 주사 양 옆에 숙소인 익사가 놓인 구조이다.

무장객사, 궐패를 모시는 주사 양 옆에 숙소인 익사가 놓인 구조이다. ⓒ 김정은

순전히 윗분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전시행정의 표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아무짝에도 못쓸 돌덩어리인 선정비를 지나쳐 앞으로 계속 가다보니 아담한 축대 위에 세운 단아한 무장객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무장객사의 독특한 지붕선

무장 객사 또한 다른 곳의 객사가 그렇듯 왕을 상징하는 전패나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를 안치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마다 문안을 드리는 용도로 사용되는 건물 주사를 중앙으로 하여 양 옆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임시숙소로 쓰이는 익사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궐패를 모시는 주사의 지붕이 옆 건물인 익사의 두 지붕보다 높다는 점이다.

임금이 사는 대궐의 규모를 넘보지 못하게 일반인의 가옥을 99칸으로 제한했다는 조선시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일개 객사가 궁궐을 상징하는 물건을 모시는 주사의 기와선을 넘본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불경죄일테니 이러한 형식은 당연한 격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격식이든 제약이든 그 부조화스러운 기와선이 오히려 독특한 느낌을 준다. 또 한가지 약간 위압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높인 축대 계단에는 이곳의 엄숙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장난스러운 모습의 꽃이 조각되어 있었다.

a 동헌인 취백당, 일제 강점기에 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다

동헌인 취백당, 일제 강점기에 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다 ⓒ 김정은

이곳의 부조화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객사를 건너 황량한 공터를 가로질러 동헌쪽으로 오르노라니 갑자기 묘한 느낌의 소년상과 책을 읽는 소녀상이 눈에 들어온다. 오륜마크가 조각된 달리는 모습의 남자 어린이와 다소곳하게 무릎을 모으고 책을 읽는 소녀.

어디선가 본 듯한 매우 낯익은 느낌이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어린이 조각상은 바로 얼마 전까지 있었다는 무장초등학교의 존재를 증명하는 미약한 흔적 중 하나였다.

엄숙한 객사와 객사 계단의 장난스런 꽃 조각, 만화같은 느낌의 소년 소녀상들. 문득 생뚱맞아 보이는 이 부조화가 슬슬 정겨워지기 시작했다.

철제 선정비의 주인공은누구?

무장읍성에 늘어서 있는 선정비 속에 유독 눈에 띄는 비석은 바로 돌이 아닌 철로 만든 비석이었다. 그 튀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내용을 본즉 참판을 지낸 김영곤(金永坤)이라는 사람의 선정비였다. 참 이 사람도 꽤나 튀고 싶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 자리를 빠져 나오려니 문득 이상한 철비의 유래에 관해 심각하게 설명하는 한 무리의 문화답사팀 속에서 낯익은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철비가 인촌 김성수의 조상이라는 다소 의외의 이야기를 바람결에 듣고 만 것이다. 하긴 이곳과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인촌의 생가가 있으니 혹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후에 돌아와 관련자료를 뒤져보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인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궁금증을 이길 수 없어 고창문화원에 문의하니 그 철비의 주인공은 인촌과는 전혀 상관 없는무장 출신의 관리로서 갑신정변 전후로 세워진 선덕비라는 대답을 들었다. 잘못된 정보의 소통, 이번을 계기로 새삼 오류없는 정확한 글 쓰기의 어려움을 톡톡히 느끼게 된다. / 김정은
소박한 동헌과 아전들의 텃세

서둘러 예전에 동헌이었다는 취백당(翠白堂)에 올랐다. 동헌이라면 사극에서 늘 보아왔던 것처럼 금방이라도 한 고을의 원님이 높은 툇마루에 서서 호령할 만큼 큰 규모의 건물일 거라 생각했으나 이곳이 정말 동헌일까 의심스러울 만큼 소박해 또 한번 놀랐다.

1565년(조선 명종20년)에 세운 이 건물이 아무리 일제 강점기에 학교 교실로 쓰이는 등 쇠락해져서 새로 고친 것이라고 해도 동헌 자체 규모가 이처럼 소박한 이유는 무슨 곡절이 있어 보인다.

알고 보니 이곳 고창지역의 아전들은 예로부터 고창 지역에 발령난 원님들이 "나 죽었다"고 걱정을 할 정도 기가 세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런 환경이다 보니 마음에 안드는 원님들 왕따시키는 거야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었다. 당연히 원님 또한 왕따 당하지 않으려면 매사 무난하게 조심조심 지낼 수밖에.

그렇다면 읍성 앞에 늘어선 수많은 선정비들은 백성들을 등쳐먹는 원님의 전시행정의 표본이 아니라 그동안 아전 등쌀에 고생했으니 잘 가라는 의미로 아전들이 세워준 위로비였던가?

그러고 보면 1894년 이곳 무장에서 창의문을 선포하고 동학혁명을 일으킨 백성들의 심적 기저에는 고을 원님조차 마음에 안 들면 왕따시켜 버린다는 이 고장의 전통 또한 일조를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이럭 저럭 구경을 마치고 풀밭에 앉아 따스한 봄 햇살을 즐기려 했더니 눈앞에 어린아이 솜털처럼 파릇파릇한 애기쑥이 고개를 삐죽 내밀고 있었다. 쑥이나 캐서 쑥국이나 끓여먹을까?

저만치서 두런두런 들려오던 한 무리의 유적 답사팀의 목소리도 사라진 지금 쑥을 따는 내 모습 또한 자연스럽게 이 무장읍성의 정겨운 부조화 속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덧붙이는 글 | 맘 가는 대로 떠난 고창여행 네번째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맘 가는 대로 떠난 고창여행 네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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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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