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동백꽃 핏빛 사연에 눈물 짓네

[맘 가는 대로 떠나는 고창여행2]

등록 2005.05.06 08:44수정 2005.05.06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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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선운사 뒤란에 불타는 동백꽃 군락

선운사 뒤란에 불타는 동백꽃 군락 ⓒ 김정은

동백 단상

제각각 흐드러지게 핀 벛꽃길을 지나 선운사 일주문을 지나니 풍경 소리조차 잠에 빠진 듯 조용한 선운사 뒤란 5만여평에는 이곳의 주인이라 뽐내는 600년 묵은 붉은 동백꽃이 불 붙듯 피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붉은 동백꽃만 보면 왜그리 서러운지, 동백꽃이 나에게 뭐라 그러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붉은 동백꽃을 보면 애잔한 느낌이 가슴 속에서 복받쳐 온다. 동백꽃을 일러 누군가는 "붉디 붉은 색으로 피었다가 시들지 않고 한 순간에 눈물처럼 뚝 떨어지는 절개 있고 고상한 꽃"이라 했건만 눈물을 몰래 감추고 한순간에 후두둑 떨어지는 동백의 그 자존심이 오히려 슬프게 보인다.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 김용택/ <선운사 동백꽃>


이처럼 동백꽃의 이미지는 화려한 외양에 어울리지 않게 비극적이다. 동백꽃 자체가 핏빛 사연을 간직한 탓일까? 욕심 많고 포악한 왕의 권력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결한 불쌍한 동생의 피가 변한 꽃이 핏빛 동백꽃이라면 동백꽃 주위를 서성이며 벌 대신 수정을 시키는 동박새는 봄만 되면 자결한 부친의 핏빛 사연이 구슬퍼 동백꽃 주위를 맴돌며 슬픈 노래를 부른다.

a 선운사 대웅전과 앙상한  배롱나무

선운사 대웅전과 앙상한 배롱나무 ⓒ 김정은

그뿐인가? 뭇 남성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의 여주인공 비올레타의 상징 빨간 동백, 흰 동백꽃에는 은밀한 애욕과 치명적인 사랑이 뒤섞여있지만 그사랑이 너무나 치명적이기에 사람들을 눈물짓게 만든다.


백파선사와 추사 김정희

a 백파율사비가 있는 선암사 부도전

백파율사비가 있는 선암사 부도전 ⓒ 김정은

동백꽃에 빠져 있다 동백꽃 숲길을 따라 걸었더니 저만큼 역대 고승의 사리가 보존되어 있는 부도전이 보인다. 이 많은 부도들 속에서 내 눈을 사로잡는 비문은 단연 백파율사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이다.


"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라 쓰인 비문에는 부모님 비문도 쓰지 않았다는 김정희 선생이 싸우다가 정든 벗에 대한 애정이 넘쳐흐른다. 문득 백파스님이 팔십평생을 정진했다는 大機大用(대기대용)이라는 화두에 눈길이 간다.

나같은 중생이야 평생을 정진해도 내 마음 속에 주체할 수 없이 꿈틀거리는 망념과 미혹을 다스리기도 힘이 드는 터에 유(有)와 무(無)에 사로잡히지 않고, 공(空)과 색(色)에 기울어지지 않고, 동(動)과 정(靜)에 걸리지 않는다는 大機(대기)와 이러한 마음으로 모든 사물을 행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대용(大用)의 단계야 이해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바라만 보아도 너무나 까마득할 밖에…. 오히려 비문 속에 쓰여진 추사선생의 지극히 세속적인 어투의 한시 한 수가 그나마 긍선이라는 속명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백파율사의 존재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貧無卓錐 (빈무탁추)
氣壓須彌 (기압수미)
事親如事佛 (사친여사불)
家風最眞實 (가풍최진실)
厥名兮亘璇 (궐명혜긍선)
不可說轉轉 (불가설전전)

가난하기가 송곳 꽂을 자리도 없지만
기상은 수미산을 덮을 만하다.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하니
그 가풍은 정말로 진실하다.
속세의 이름은 긍선이지만
그 나머지는 말해 무엇하리오”


a 도솔암으로 향해 가는 골짜기 길 ,개울물 소리와 새소리에 홀려 길을 가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도솔암으로 향해 가는 골짜기 길 ,개울물 소리와 새소리에 홀려 길을 가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 김정은

부도전에서 너무 시간을 지체한 나머지 아쉽지만 그저 대웅전 안 금동보살좌상에게 절이나 넙죽 올리고 육체와 마음의 평안을 기원하는 것으로 위안 삼고 떠나려니 대웅전 앞쪽 처마기둥 사이사이에 단청으로 그려진 나한들과 아직 꽃 피기 일러 앙상한 배롱나무가 잡념을 떨치기 힘들어 하는 내 마음 속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하다.

a 걷기 지루하다 싶을 때면 한번씩 나오는 다람쥐의 앙증맞은 모습

걷기 지루하다 싶을 때면 한번씩 나오는 다람쥐의 앙증맞은 모습 ⓒ 김정은

이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다시 선운사 담벼락을 타고 도솔암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도솔암으로 가는 3km에 걸친 골짜기 길은 부담없이 천천히 걸어갈 수 있는 산책길이다. 개울물 소리에 홀려 길을 가다보면 이슬을 머금고 푸릇 푸릇 자라고 있는 차밭도 볼 수 있고 심심하다 싶으면 한 번씩 다람쥐가 나타나 여행객의 눈을 심심하지 않게 하는 매력이 있다. 게다가 8~9월만 되면 이 부근에 꽃무릇이 그득 핀다고 하니 놓쳐서는 안 될 코스인 것만은 확실하다.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온 시간의 향기

a 진흥굴과 장사송 , 장사송의 8개 줄기는 팔도를 가리키지만 그 가지를 수많은 전선줄이 가리고 있다.

진흥굴과 장사송 , 장사송의 8개 줄기는 팔도를 가리키지만 그 가지를 수많은 전선줄이 가리고 있다. ⓒ 김정은

얼마쯤 지났을까?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 엄마의 돌무덤이 놓여진 자리로 유명세를 탄 진흥굴이 보인다. 이 진흥굴은 진흥왕이 부처님의 게시를 받아 백제땅이었던 이곳에 의운국사를 시켜 선운사를 창건케하고 퇴위한 후 이 굴 속에서 수도를 했다고 한다. 그 옆에는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의 넋이 서린 600년 수령의 소나무 장사송이 한결같이 버티고 있다.

진흥왕과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실체를 알아낸 김정희, 추사와의 치열한 논쟁 끝에 친구가 된 백파스님, 백파의 혜안으로 추사가 지은 시호를 물려받은 당대의 선지식 석전스님을 떠올리며 느낀 미약하지만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인연의 끈, 이러한 느낌이 바로 소설가 구효서가 선운사 부도전을 보며 느꼈다는 "영원의 세월을 가로질러 온 향기"일까?

영원의 세월을 거슬러 왔건 시간을 거슬러 왔든지 간에 그러고 보면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인연이란 없는 것같다. 그 인연이 좋은 인연이면 향기가 나고, 악연이면 악취가 풍길테지만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선운사 동백꽃을 보며 애잔해하거나 부도전의 돌무더기와 소박한 굴속에서 고인이 된 역사 속 인물 들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몇 천겁부터 미리 예정된 나와 선운사와의 인연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만난 인연이라면 부디 좋은 인연으로 남아주기를 빌며 다음 목적지인 도솔암으로 오르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덧붙이는 글 | 맘 가는대로  떠나는 고창여행 두번째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맘 가는대로  떠나는 고창여행 두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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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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