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김유정

김유정 전집을 읽고

등록 2005.06.05 05:47수정 2005.06.05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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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전집 1
김유정 전집 1곽동운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가 김유정은? 먼저 소설 <동백꽃>과 <봄·봄>이 떠오를 것이다. 또 두드러진 해학과 토속적인 문체가 다음을 이을 것이다. 거기서 끝인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이상 김유정에 대한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이다.

왜? 거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김유정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동백꽃>과 <봄∙봄>의 작가로, 또는 해학과 토속적인 문체의 소설가로 김유정이 '박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수식어로 김유정을 묶어두기에는 그의 작품세계가 그렇게 단조롭지 않을뿐더러 그의 사상을 담아내기에도 역부족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김유정은 교과서에서 던져준 몇 개의 단편적 지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동백꽃과 봄·봄 이외에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과연 김유정이 그거 밖에 내세울 게 없을까?

김유정역과 실레마을

2004년 12월 1일. 우리 철도 역사상에 의미 있는 일이 하나 벌어졌다. 경춘선 신남역이 김유정역(驛)으로 개명한 것이다. 특정인의 이름을 딴 역사 명(名)은 처음인데다, 그 인물이 김유정이란 30년대를 풍미한 걸출한 소설가라는 사실이 세간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개명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기는 했지만 김유정역은 분명 시골 간이역이다. 역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들이 아담한 농촌 촌락이라 거주 인구가 적기 때문이리라. 그 소박한 간이역을 빠져나와 약 10분 간 걸으면 김유정 문학촌에 당도할 수 있다.

그 곳이 바로 김유정이 태어난 실레마을이다. 경춘선 코스가 그렇듯 실레마을도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그런 아름다운 풍광이 김유정의 창작열을 자극시켰을 것이라는 건 쉽게 추측할 수 있겠다.


약 30여 편에 이르는 김유정의 단편소설들의 상당수가 그 실레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실레마을이 전형적인 강원도 농촌인 터라 남도 지방의 평야지대와는 토지 이용 방식이 다르다. 즉,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주를 이루었다.

산지가 많기 때문이다. <아내>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빈농들은 겨울 산에서 나무를 해와 가지고, 그걸 장에다 팔고 조나 옥수수로 연명을 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동백꽃>의 '나'와 점순이가 함께 '찐하게 쓰러진' 장소도 산길을 타고 올라가야 있었고, <만부방>에서 노름꾼들이 투전을 벌이던 장소는 인적이 드문 산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환경은 김유정 문학에 토속성과 해학성을 빼놓을 수 없는 기반으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즉, 산골짜기 촌동네에서 벌어진 일들을 소설로 옮기다보니 토속성과 해학성이 기교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작품에 녹아서 분리할 수 없이 융합됐다는 것이다.

김유정 문학촌 전시관
김유정 문학촌 전시관곽동운
<동백꽃>과 <봄·봄>을 넘어서

<동백꽃>과 <봄·봄>은 김유정의 뛰어난 역량이 드러난 작품이다. 그만큼 좋은 작품이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은 아니라고 감히 말해본다. <동백꽃>과 <봄·봄>이 김유정의 대표작이 아니라니! 필자는 무슨 근거로 '코페니쿠스'적인 선언을 하고 있는가.

여기에 우리가 몰랐던 김유정이 있다. 김유정은 약 30편의 단편소설과 10여 편의 수필을 발표한다. 작품 활동 기간이 약 4년이었던 점, 그 기간동안 잦은 병치레를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다작을 한 셈이다.

나는 여기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일단 김유정의 작품들을 열거해보자.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금따는 콩밭, 노다지, 만무방, 산골, 동백꽃, 아내, 가을.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작품 태반이 자신의 고향 실레 마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동백꽃>과 <봄∙봄>은 산골마을의 순박한 처녀ㆍ총각의 사랑이야기가 주된 테마다.

물론 <동백꽃>에서는 마름집의 딸 점순이와 소작을 붙이는 우리집의 '나'라는 계급갈등이 있고, <봄∙봄>에서는 데릴사위제로 인한 '나'와 장인 간의 갈등이 있다. 하지만 두 작품 다 주된 행위자는 '나'와 '점순이(동백꽃과 봄봄, 두 작품 다 여주인공 이름은 점순이다)'였고, 그들은 서로 연정을 품거나 품게 된다.

그럼 두 작품들 이외에는 어떤가? 산골마을의 소박한 젊은 남녀의 러브스토리가 김유정의 다른 단편들에도 나오는가? 아니다. 가족이란 이름 하에 남편과 부인간의 정(情)은 있을지 몰라도 남녀간의 연애에 치우친 작품들은 없다. 들병이가 등장하는 작품이 여럿 있지만 들병이와 러브스토리는 거리가 먼 게 사실이다.

김유정의 생가
김유정의 생가곽동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뜨거운 사랑

대부분 김유정의 작품은 당시 찢어지게 가난했던 농민들 이야기다.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금따는 콩밭, 노다지, 만무방, 산골, 가을. 등등 김유정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이런 이면에는 농민들과 주저 없이 막걸리 잔을 돌렸던 그의 호탕함과 약 한 첩 제대로 짓지 못하고 병마와 싸워야했던 그 자신의 궁핍함이 작용했으리라. 금병의숙이라는 야학을 지어 문맹퇴치에 일조를 했던 그의 따뜻함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너무나 가난해 자신의 아내를 두고, 들병이로 나서라 재촉하는 당시의 처참했던 농촌상을 그리는 게 일련의 김유정 작품이 추구하는 바였다. 즉 <동백꽃>과 <봄·봄>이 좋은 작품임은 틀림없지만 김유정 단편의 진면목은 <산골나그네>나 <만무방>,<금따는 콩밭> 등에서 나타난다. 그렇다. <동백꽃>과 <봄·봄>은 작가의 사회의식뿐만 아니라 작품의 연속성 측면에서도 김유정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동떨어져 있다.

책장을 덮으며

김유정은 토속어 사용 등으로 유명한 작가다. 만약 그의 단편들을 원전으로 읽었다면, '독해'하느라 머리 좀 아팠을 것이다. 이 가람기획의 책에 본 기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2권 말미에 작품연보와 작가연보, 그리고 어휘풀이가 친절하게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작품은 마치 판소리 사설을 읽는 듯 리듬감도 있다. 그래서 책장을 넘길수록 읽는 속도가 붙는다.

일제의 수탈에 신음했던 1930년대의 농촌과 도시의 소외된 군상들을 특유의 해학과 재치로 덤덤히 풀어냈던 김유정의 작품들은 민족문학의 보배와도 같다. 병마로 30살도 채우지 못하고 불꽃같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였기에 누구보다도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보냈을 게다. 그래서 <동백꽃>과 <봄·봄>에 김유정을 묶어둘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몰랐던 김유정이 너무 많지 않았나? 그렇지 않았나?

*** 들병이: 사전적 의미는 병술을 파는 떠돌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는 농한기에 술도 팔고 몸도 파는 여인네를 말한다. 자신의 부인을 들병이로 나서라고 다그칠 정도로 김유정 단편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하긴 그 당시 농촌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빚만 더 쌓여 갔으니. 카드빚에 내몰리고, 생활고에 내몰린 2005년의 서민들이나 대륙침탈에 눈이 먼 일제가 조선을 착취했던 1930년대의 농민들이나 7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고생하긴 매 일반이다.

덧붙이는 글 | 서평 전문 사이트 리더스 가이드(www.readersguide.co.kr)에도 싣습니다.

덧붙이는 글 서평 전문 사이트 리더스 가이드(www.readersguide.co.kr)에도 싣습니다.

원본 김유정 전집 - 개정증보판

김유정 지음, 전신재 엮음,
강,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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