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과는 다른 세계를 꿈꾸는 아이들

무라카미 류의 <엑소더스>, 그리고 우리 학생들의 '엑소더스'를 위한 단상

등록 2005.06.09 06:57수정 2005.06.0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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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무라카미 류, <엑소더스> 표지.

무라카미 류, <엑소더스> 표지. ⓒ 웅진닷컴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처럼 아이들에게 자기들을 닮으라고 강요하는 어른들이 있을까? 부모님이 정해주는 길을 선생님이 가르치는 대로 뚜벅뚜벅 걷는 '모범생 시나리오'가 있고, 그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도 묻지 못하게 하는 입시지옥, 그리고 거기에 따라오는 두발규제, 야간자습, 내신, 수능, 수행평가,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끊임없이 아이들을 옥죄며 요구되는, 문제제기의 권리를 박탈하는 '학생다움'이라는 가치까지….

아이들의 모든 질문들에 대해 "너희들도 나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있단다"는 동일한 답변만을 반복하는 어른들. 그런데 어느 노래 가사처럼 "그 훌륭한 어른들이 이끄는 세상은 왜 요 모양일까?" 어쩌면 그 질문의 대답은 '교실 이데아'라는 노래가 왜 그렇게 많은 아이들의 열광을 이끌어냈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지 모르겠다.


당시 서태지는 어른들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모범생 시나리오'의 '외부'였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로 승부를 걸었던 그는 은폐되었던 세대 간의 균열을 꺼내 보여주고, 어른들에게 기대지 않고 '아이들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느끼며 사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 첫 번째 케이스라는 의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실 이데아' 이후, 세대 갈등은 다시 뒷전의 문제로 밀려났다. 지역갈등이나 계급갈등, 혹은 성별갈등의 문제들은 모두 지난 시대에 한 번씩 주목받았거나 주목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대 갈등은 그 중요성에 비해 진지하게 숙고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들이 언제나 어른들에게 얽매여 미약한 발언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그들의 '자식'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세상의 때가 아직 묻지 않은 아이들을 세상에 길들이려 하는 어른들이 '언제나' 있다면. 또 아이들이 그런 길들임 이전에 자신의 욕망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면. 세대간의 갈등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건 어쩌면 아주 무서운 일일지 모른다. 항상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어른'의 틀을 상정해 놓고, 수만 가지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을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틀의 내부에 쑤셔 넣어 오직 하나의 방향을 갖게 만드는 사회. 정상과 보통을 향한 집착으로, 마치 아이들의 힘을 빼 식물들로 만들려는 듯한 규제들이 지배하는 학교.

무라카미 류가 살고 있는 일본도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았나 보다. "희망 빼고는 모든 것이 있는" 곳으로 어른들의 세계를 정의한 그는 단호히 말한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교육개혁은 당장 수십만의 아이들이 등교거부를 하는 것"이라고. 그것은 아직 '어른'이라는 기성의 사회 내부로 포섭되지 않은 아이들의 상상력과 꿈꿀 수 있는 권리들을 자유롭게 하자는 말일 것이다.


꾸준히 써오던 기존의 사소설(私小說)의 한계를 넘어 비로소 사회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무라카미 류의 드문 모습을 우리는 이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엑소더스>는 더 이상의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는 무력한 어른들의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를 건설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야기의 발단은 CNN의 카메라에 포착된 아프가니스탄의 일본계 소년이었다. '파슈툰'이라는 부족의 일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소년은 계곡에 매설된 수만개의 지뢰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다가 부상을 입었다. 일본인이라는 '내부'의 정체성을 거부하는 그는 얽매이지 않은 '외부'가 주는 행복함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땅에는) 모든 것이 있어. 살아가는 즐거움, 가족과 우정과 존경심과 자긍심. 그런 것들이 있어. 우리에게 적은 있지만, 이지메를 가하는 사람도 없고 이지메를 당하는 사람도 없어"(9쪽)

처음에 일본의 매스컴들은 이 소년을 그리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 소년은 일본의 중학생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길들임의 과정 '외부'에 오히려 희망과 행복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고, 뒤늦게 수습을 위해 이 소년을 폄하하고 무시하려 한 어른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등교 거부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간다.

화염병을 들지도 않고, 치열한 가두시위도 없이, 인터넷이라는 그들만의 무기를 든 중학생들은 그들의 꿈대로 학교와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퐁짱'이라는 아이와 그 친구들은 어른들의 위계 조직이 아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오로지 그들의 생산적인 상상력만으로 굵직굵직한 사업들을 계획하고, 자금을 마련하고, 서로간의 연대를 통해 자신들의 '무혈혁명'을 진행해 나간다.

무라카미 류가 보여주는 의외의 사회학적, 경제학적 상식과 함께 중학생들이 자신의 상상력에 자금력과 추진력을 더해가는 모습은 흥미진진하다. 중학생들이 '희망'으로 쓰는 자신들의 유토피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이 내부강박의 사회에서 '엑소더스'를 꿈꿔온 우리들에게 이 소설은 후련함을 준다. 그러나 이건 단지 소설 속의 공상으로만 가능한 일일까? 너무 강력하게 아이들을 옥죄는 '입시지옥'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다른' 유토피아를 꿈꾸는 아이들의 욕망은 더 강력하지 않을까?

얼마 전, 입시지옥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한 아이를 추모하기 위해 우리 아이들이 모였다. 그러나 소설 속의 일본 어른들보다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제시하는 '외부'에 대해 명민한 대응을 할 줄 아는 것 같다.

경쟁이라는 어른들의 원리를 거부하고, 같은 처지의 아이들끼리 사랑하게 되는 '외부'가 가진 위험함을 어른들은 간파한 것이다. 어른들이 구축해 놓은 틀의 붕괴를 막기 위해 교사들과 경찰들이 비상근무를 서고 매스컴들은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에 반해 너무나 평화로웠던 아이들의 눈물겨운 시위는 그들의 '엑소더스'와 어른들의 세계 간의 괴리를 잘 드러내주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좌절하지 않는다. 두발규제와 입시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입장을 피력하겠다는 아이들이 '그들만의' 모임을 결성했다고 한다. 한고련(한국고등학교 학생회 연합회)의 출범은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한계지우는 입시지옥의 틀을 간과해서도 안 될 것이다.

아이들이 반드시 무엇을 바꾸기를 기대하는 건 아니다. 반드시 '엑소더스'가 꼭 소설 속의 훗카이도처럼 물질적인 유토피아로 제시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규제와 금지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는 이미 가능성이 닫혀 있는 죽은 사회다. 단지 여러 방향으로 열려 있는 '외부'를 보여주는 것. 그들의 욕망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잃어버린 '희망'과 '생기'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아닌가?

모두가 '위기'라는 지금, 다른 세상을 꿈꾸는 고등학생들을 주목하는 이유이다. 그들의 가능성과 한계 모두를 지지한다.

덧붙이는 글 | 한 고등학생의 푸념을 들었다. 내신의 압박 때문에 자기들은 "수능을 12번 보는" 것 같다고. 학교 교육의 정상화도 좋지만, 아이들을 불구로 만드는 학교 교육의 정상화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보게 만드는 이유 있는 푸념이다. 학교 시험은 잘 못 보더라도 말 안듣는 아이들은 대개 창의적이다. 아이들을 무한한 시험의 홍수에 묶어두어서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한 고등학생의 푸념을 들었다. 내신의 압박 때문에 자기들은 "수능을 12번 보는" 것 같다고. 학교 교육의 정상화도 좋지만, 아이들을 불구로 만드는 학교 교육의 정상화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보게 만드는 이유 있는 푸념이다. 학교 시험은 잘 못 보더라도 말 안듣는 아이들은 대개 창의적이다. 아이들을 무한한 시험의 홍수에 묶어두어서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엑소더스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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