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읍 전경최삼경
'도시락은 청색이나 홍색 보자기로 싸고, 밥은 4주걱은 담지 않는다', '갱내에 살고 있는 쥐는 잡지 않는다', '까마귀 울음소리를 들으면 조심하여야 한다' 이것이 무슨 얘기인지 아시는가? 이는 '광산촌의 금기'로 광부들의 은밀하지만, 삶의 애착이 담긴 애절한 생활금기 목록이다. 삶의 막바지로 내몰린 사람들의 인생 막장 생활, 그것은 이렇게 소박한 문구들에도 자신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살얼음판 생활들로 이어졌던 것이다.
<회색도시> 작가 현길언이 80년 사북사태가 일어난 후, 쓴 소설이다. 사북사태는 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나흘간 사북광업소 광원들과 가족 4천여 명이 경찰과 격렬한 대치를 벌이며, 잠시나마 무정부 상태에 빠진 사건을 말하는데 이 일로 1명이 사망하고, 관련자 25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는 등 당시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준 일대 사건이었다.
사람에 따라 사북사태는 그 뒤 일신제강, 부산 파이프 등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으로 이어졌고, 5·17 광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는만큼, 이 사건은 '서울의 봄' 이후 급격한 혼란과 갈등의 신호탄이 되었다. 소설은 사북사태 수습을 위해 주인공이 새로운 의욕을 갖고 광업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주인공 인경진은 광업소의 노조 지부장 및 간부들의 은근한 견제와 회유에 시달리지만, 자기를 밀어 주는 석공사장과의 핫라인을 가동하며, 중앙의 의중을 관철해 나간다. 여기서도 제도권 실세와의 끈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한때 몸통과 깃털이란 말이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던 때도 있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관계'는 이미 자신의 힘을 공고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