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목리 부근에서 훈련 중인 군인들최삼경
그 중 우리네 인간사의 변화를 축약해 보자면, 먼저 지난 유월 한 부대에서 수류탄 투척으로 인한 인명피해를 냈던 사고와 인격을 말살하는 엽기적 사건들로 점철됐던 군부대, 병영 문화의 변화에 주목할 수 있겠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완고한 군 조직에도 피할 수 없는 변화의 회오리가 예고됐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질 듯 하다.
특히나 분단의 현실적 강박을 안고 살던 우리의 특수한 상황 하에서 '군'이라는 특수한 집단은 여전히 불가침적인 '우리 시대의 냉전 박물관'으로 고스란히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국방색으로 상징되는 기존 이데올로기는 바뀌어가는 '주적' 개념과 관련하여 흔들리는 청춘의 차압딱지로 오버랩 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병사들을 짓누르는 것은 '반공'이나 '멸공'의 의무감도, 일촉즉발의 전쟁발발의 위기감도, '전쟁'이 주는 죽음의 공포감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개인을 허용치 않는 전체주의에 대한 절망과 '충성, 애국'이라는 개념이 주는 모호함이 커 보인다. 지금의 혼란은 그동안 군기유지의 주요수단으로 쓰였던 구타가 적어짐으로 인한 '공백'이 여전한 물음표로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작가 하창수에게 있어 '군인의 길'은 어느 날 강보에 쌓여 있다 내팽개쳐진 아이가 '장난과 허위와 정신의 전진이 허락되지 않는 나날에서 오래 슬퍼하지 않는 일과 입 다무는 것, 그리고 눈감아주는 일'을 익히는 일이 된다. 그럴수록 '스물다섯 살의 여윈 몸과 눅눅한 기억의 그림자들, '선택할 수 없음으로 인해' 결코 쉽게 '돌아설 수 없는' 개인과 젊음을 지켜 나가는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이란 답답한 군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허무한 날들이여! 누가 누구에게 몇 줄의 글을 써 보낸들 정작 무엇이 새로울 것이며, 그것은 또 얼마나 우리의 불안을 거두어 갈 수 있으랴.
작가 하창수에게는 현실 그 자체가, 사회 전체를 통째로 전체주의로 몰던 정부나, 이런 움직임에 대한 80년대의 반정부 민주화 투쟁, 노동현장에서의 행동강령까지도 '전체주의'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하여 그는 여전히 인간을 억압하는 굴레로부터 끊임없이 탈출하려고 애썼던 안간힘은 무엇이며, 소설은 과연 그 억압의 굴레로부터 인간을 얼마만큼이나 자유롭게 만들었는지를 반문하고 궁구하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