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 강원도 , <오세암>

등록 2005.06.09 17:59수정 2005.06.1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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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오세암 가는 길

오세암 가는 길 ⓒ 최삼경

지난 달 20일 오세암이 있는 설악산 마등령 중턱으로 오르는 길은 한창 공사 중이었다. 하늘과 땅이 만들어내는 천지공사, 그야말로 울울창창, 만화방창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우리는 곧잘 사계절을 인생에 비유하곤 하는데 인생의 유년기, 봄을 맞은 설악산은 새로운 생명활동으로 푸르게 분망하였다.

산은 멀리서 바라보면 녹색의 단일화로 보이지만, 산 속 가까이 들어가 보면 그 안에는 많은 색의 정교한 스펙트럼이 펼쳐져 있다. 거기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펼치는 노랑과 분홍과 빨강과 하얀 색들이 살랑거리며 숲이 만들어 낸 푸른 바다가 되어 넘실거리는 것이다. 요컨대, 신록이라 할 때의 숲은 하나로 된 일방의 색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작가 정채봉은 1946년생으로 지난 2001년 지병으로 타계하였는데 한국 동화작가로는 처음으로 독일과 프랑스에서 작품을 번역 출간하였으며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척한 현대 문학사의 거목이다. 작가는 책머리에 평소 동화를 쓴다는 것에 행복하면서도, 간혹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썼다. 행복하다는 것은 동심을 찾는 작업이 주는 감동 때문이며, 이러한 맑음과는 거리가 있는 세상살이에 허덕이는 자신을 볼 때 부끄럽다는 소회를 적었는데, 사진으로 보는 그의 모습은 깊은 소(沼)의 물빛처럼 맑고 선해 보인다.

오세암은 백담사의 부속암자로 647년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뒤 관음암이라 이름 하였다. 후에 조선 세조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이곳에서 출가하였고, 명종 때 보우(普雨)가 수도하던 중 문정왕후에 의해 선종판사로 발탁되는 기연을 갖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1643년 인조 때 설정(雪淨)이 중건하고 오세암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동화 <오세암>은 실제로 이 암자를 중건한 설정스님에 얽힌 전설과 관계 깊다고 한다. 설정 스님이 나이 어린 조카를 데려다 키웠는데 데려올 때 나이가 네 살이었고, 그 어린 조카가 이듬해 겨울에 죽어 성불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동화는 바로 이 전설에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해 구성한 창작품인 셈이다.

"감이는 육신의 창문이 닫힌 거구,
길손이와 나는 마음의 창문이 닫혀 있는 거지"


백담사에서 수렴동을 따라 영시암까지 이어지는 길은 산책로처럼 완만하다. 옆으로 계곡을 끼던 길은 왼쪽 오세암으로 가는 길로 꺾어 들자 제법 산세가 가팔라진다. 멀리 오세암을 연꽃 마냥 감싸 안은 관음봉, 나한봉, 사자봉, 망경대와 멀리 귀떼기청봉의 위용이 하늘까지 치솟은 금강송처럼 푸르고 의연하다.

오세암은 우리나라 5대 관음 성지 중의 하나로 많은 불자들이 찾아와 간절히 서원(誓願)하는 곳이다. 화택(火宅) 같은 인생의 고비에서 그 이름을 오로지 간구하면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보듬어준다는 대자대비 관음보살은 그래서 단연 우리 중생들과 친숙한 존재가 된다.

a 삼림전경

삼림전경 ⓒ 최삼경

동화 오세암이나 실제의 오세암을 대했을 때 이어지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천의무봉이 주는 어떤 순수한 힘의 실체였다. 갓 태어난 아이는 백지와 같지만, 양육과정에서 함부로 그림이 그려진다. 그래서 어느 정도 사회에 순응이 되었을 때는 이미 그 원초적 순수를 간직하기는 어려워진다. 이런 점에서 아이들의 순수 혹은 영악지수는 그 사회의 건강성을 나타내주는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유독 화재와 전란으로 인한 소실과 중건이 반복됐다는 백담사와 오세암에서 지난날의 상흔은 찾아보기 힘들다. 거기에는 한때 이곳에서 위리안치의 시간을 보냈던 전(前)대통령의 자취도 없거니와 고요하게 새벽예불을 드리던 만해의 청정한 숨결도 찾아볼 길이 없다. 다만 조금 크다싶게 중창된 오세암 옆으로 빼곡히 들어찬 나무들이 무심한 듯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a 오세암 풍경

오세암 풍경 ⓒ 최삼경

눈이 시리도록 맑은 이야기, 산 속 깊은 샘의 얼음장 물을 먹는 듯한 느낌, 천진한 어린 아이의 마음을 닮는다는 것. 그것은 욕심을 버리는 일일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다. 부와 권력과 경쟁만이 칼끝처럼 날이 서 있는 지금, 이 나무와 숲, 산을 닮은 세상을 꿈꾸어 본다면 글쎄 지나친 욕심일까?

오세암 앞마당에서 한 땀 좋이 쉬다 일어서자 문득, 설악의 청정 바람이 풍어를 흔들어 놓는다. 티 없는 풍경소리에 온 산이 가득한 상생정신으로 그윽해지는 느낌이다. 그동안의 짐과 걱정을 훌훌 벗어놓고 다섯 살 같은 순진무구의 세계로 가라고, 그 길을 걸으라고, 오세암의 산과 바람은 천 년 전 부터 고요하게 알려주고 있었는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강원도청에서 발행하는 웹진 "강원도 세상"에 5월 26일 실린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강원도청에서 발행하는 웹진 "강원도 세상"에 5월 26일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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