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밑에 살아가는 작고 여린 것들에 관한 느낌

손광성의 화문집 <작은 것들의 눈부신 이야기>를 읽고서

등록 2005.07.15 17:05수정 2005.07.16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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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때 내가 본 바다는 하나의 경이였다. 스물이 되었을 때 바다는 어느새 늘 함께 하고 싶은 갈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이제 노년의 고갯마루에서 지금 나는 다시 나의 바다를 본다. 바다는 그의 젊음으로 내 나이를 지우고 그의 커다란 눈물 속에 나의 작은 눈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침내 바다는 그의 품 안에 나의 존재마저 말없이 보듬는다.”

이는 수필가이자 동양화가인 손광성씨가 펴낸 화문집 <작은 것들의 눈부신 이야기>(눈빛·2005)에 나오는 글이다.


함경남도가 고향인 그는 6.25때 월남하여 문학에 몸을 담았다가, 교편을 잡고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렇지만 결코 미술에 대한 뜻을 꺾을 수 없어서 나이 마흔이 넘어서 다시금 미술 공부를 시작했고, 얼마 전에는 산뜻한 개인전도 두 차례나 가진 바 있다.

그가 쓴 글이야 <달팽이>나 <나도 꽃처럼 피어나고 싶다>를 읽어만 봐도 얼마나 깔끔하고 맛깔스럽게 썼는지 알 수 있다. 이번에 그가 펴낸 화문집 속에 담긴 글들도 마찬가지이다. 정말로 정갈하면서도 무언가 깊은 뜻을 생각토록 해 주는 글이 많이 담겨 있다.

'선인장의 항변' 옆에 나란히 그려 넣은 선인장 그림 한폭
'선인장의 항변' 옆에 나란히 그려 넣은 선인장 그림 한폭눈빛
"가시가 돋쳤다고
미워하지 마세요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랍니다
혐의 같은 건
두지 말았으면 합니다
의심을 받아야 한다면
보이는 가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시가 아닐까요
사람의 혓바닥을 보실래요
아주 나긋나긋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날름거리고
외국어 발음도 유창하고
당신을 꼬실 수도 있습니다
키스 한 방에 당신을 날려 보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가시돋친 독설이 되어
당신의 가슴을 찔러대고
기억에 아픈 상처를 남길 겁니다
독설은 피 없이 사람을 죽입니다
이제 아셨나요
보이는 가시보다 무서운 건
보이지 않는 가시란 걸.

(‘선인장의 항변’전문, 40쪽)

참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게 다가오는 시 한편이다. 그렇다면 그가 그린 그림들은 또 어떠한가. 위에 있는 선인장 그림을 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그린 그림들은 정말로 맑고 곧고 따뜻하다. 요란하지도 않고 거칠지도 않다. 그저 단아하고 청순하다.

뭐랄까. 화장을 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곱고 아름다운 그런 수줍은 새색시 같다고 해야 할까. 강렬하지는 않지만 뭔가 마음 한 구석에 오래도록 남을 그런 그림들이다.

그림을 그리는 소재 또한 거창하지 않다. 세상에 이름난 곳이나 기암절벽 같이 멋들어진 곳이 아니다. 수려한 산자락도 하늘로 쭉 뻗어 있는 고층 건물도 아니다. 그저 꽃과 새와 달팽이, 선인장과 금붕어와 수박 같은 것들이다. 땅 밑에 살아가는 작고 여린 것들이다.


그런 그림들과 짧지만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글들이 여유롭게 들어 차 있는 이 화문집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네 가지 틀로 짜여 있다. 아마도 동양화가답게, 우리나라 사계절을 깊이 생각해보자는 그런 뜻에서 짠 것 같다.

그 가운데, ‘양귀비꽃 전설’이라든지 ‘달개비와 바랭이 혼사’ 같은 글은 짧지만 정말로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고, ‘여우사냥’ 같은 글은 어린 시절에 겪었던 그 모습 그대로를 느낄 수 있어서 더욱 재미있다.


함경도가 고향 땅인 그는 다른 꽃과는 달리 ‘동백꽃’을 대할 때마다 그 느낌만큼은 남다르다고 한다. 그에게는 동백꽃이 경이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설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그가 봤던 동백꽃은 실물이 아니라 집안 벽장문 속에 붙어 있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6.25때 월남하여 피란살이를 할 때에 봤던 그 동백꽃은 그림이 아니라 정원 속에 살아 있는 실물이었고, 그 색깔이 그림 속에 담겨 있는 동백꽃과는 달리 너무나 불붙듯이 강렬했다.

그래서 그토록 경이로웠지만, 그러나 그 동백꽃을 볼 때면 자기가 살던 고향 땅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와 있는지 비로소 실감할 수 있는 까닭에,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 붉은 꽃은 나에게 있어 경이로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촘촘한 꽃술과 그 끝에 보주처럼 달려 있던 노란 꽃 밥들이 그렇게 선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낯선 꽃으로 해서 나는 내가 살던 고향으로부터 멀리, 아주 멀리 떠나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매우 아름다운 꽃이었지만 나에게는 그만큼 낯선 세계의 꽃이기도 했다.”(75쪽)

아무쪼록, 작고 여린 것들 속에서 소중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고, 또 그것들 속에서 멋진 동양화 한 폭도 함께 감상하고 싶다면 이 책을 들여다보길 바란다. 이 책에 담겨 있는 그림과 글들은 결코 우리 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위대하고 웅장한 것들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땅 밑에 살아가는 너무나도 작고 여린 것들에 관한 느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작은것들의 눈부신 이야기

손광성 지음,
눈빛,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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