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총독부 눈 피해 '훈민정음' 원본 지켰다

<간송 선생님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유산이야기>를 읽고

등록 2005.08.19 12:11수정 2005.08.19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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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간송 선생님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 책 표지 / 한상남, 샘터

<간송 선생님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 책 표지 / 한상남, 샘터 ⓒ 샘터

우리는 광복 60돌을 맞았다. 잃어버린 조국을 찾은 광복의 기쁨은 해방 당시 온 겨레의 가슴 속에 넘쳐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광복을 맞는 데에는 많은 선각자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직적접인 독립운동은 아니지만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하겠다.

일제 강점기, 6·25로 이어지는 험한 역사의 고비마다 수난과 역경 속에서도 일본 사람들과 외세로부터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내기 위해 평생을 바친 간송 전형필 선생은 그 중 돋보이는 사람일 것이다. 그 간송 선생의 삶과 그가 지켜낸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이야기들을 어린이들에게 소개하는 책 <간송 선생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유산이야기>(한상남 글, 김동성 그림)가 샘터에서 나왔다.


선생은 우리가 나라를 일제에 빼앗겼어도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낸다면 우리 겨레의 전통, 우리 겨레의 정신은 다시 이어나갈 수 있다는 신념으로, 우리 문화유산이 일본인 손에 넘어가는 것을 온 재산을 다 바쳐서라도 막으려 노력했다.

a 간송 선생이 스승인 고희동 선생과 함께 위창 선생의 서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 / 김동성 그림

간송 선생이 스승인 고희동 선생과 함께 위창 선생의 서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 / 김동성 그림 ⓒ 샘터

3·1운동을 이끌었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셨던 위창 오세창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일에 대한 소명의식을 키워나간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 오세창 선생의 고증과 감식에 도움을 얻어 고려청자, 조선백자, 추사 김정희의 작품, 풍속화첩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우리 문화유산을 일본인으로부터 되찾아오기까지 과정을 감동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숨막혔던 순간을 꼽는다면, 1942년 훈민정음 원본이 안동에 있다는 사실을 듣고, 일본 사람들 몰래 소유자가 원한 물건값의 10배를 주고, 훈민정음 원본을 구입해 지켜낸 일일 것이다. 당시 간송 선생은 해방이 될 때까지 이 일을 절대 비밀로 부쳤는데 한글을 지키던 조선어학회 학자들을 감옥에 가뒀던 일본총독부가 이를 알았다면 훈민정음 원본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지 등골이 오싹하기까지 한다.

물론 최근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은 그동안 알려진 것처럼 경북 안동군 와룡면 이한걸 집에서 그의 아들 이용준이 발견한 것이 아니고, 실제는 같은 안동의 광산김씨 종택인 긍구당 소장본을 이용준이 훔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그 주장의 사실 여부가 선생의 노력을 깎아내릴 근거는 아니다.

a 간송 선생이 지켜낸 국보 제 70호 훈민정음 목판본(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간송 선생이 지켜낸 국보 제 70호 훈민정음 목판본(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 샘터


a 금강내산 / 정선, 비단에 채색, 49.5cm Ⅹ32.5cm, 해약전신첩 중에서

금강내산 / 정선, 비단에 채색, 49.5cm Ⅹ32.5cm, 해약전신첩 중에서 ⓒ 샘터


a 간송 전형필 선생 / 김동성 그림

간송 전형필 선생 / 김동성 그림 ⓒ 샘터

그런데 선생은 어떻게 문화유산을 지키는데 자신의 삶과 온 재산을 바칠 수 있었을까? 선생이 물론 장안의 큰 갑부였기에 가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돈 많은 부자들이 더욱 돈에서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추잡한 행위를 하는 요즘의 재벌들을 보면서 돈이 많다고 해서 그런 철학을 실천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한 번은 천 마리의 학이 난다는 '청자상감운학매병'을 소유자인 일본인 골동상이 부른 값에 한 푼도 깎지 않고 샀다고 한다. 그 뒤 한 유명한 일본인 수집가가 산 값의 배를 주겠다는 것을 거절한 것은 선생이 돈 때문에 문화유산을 사들인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하겠다.

선생은 우리의 문화유산이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되찾으려 했다고 한다. 사람을 일본까지 보내 거금을 들여 다시 문화유산을 회수했지만 그것의 가치가 대단하지 않았어도 후회하는 법 없이 다시 찾았음을 기뻐했다는 이야기는 선생의 철학을 충분히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민족교육에도 소홀히 하지 않아 쓰러져가는 보성학교 인수에 엄청난 빚을 떠안은 채, 큰 인수대금을 치른 데다 6·25라는 전쟁의 공간 속에도 문화유산을 지키고, 도둑맞은 문화유산을 되찾는데 큰돈을 쓴 까닭으로 그 과정에서 경제적 어려움이 컸기에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것은 큰 갑부의 엄청난 재산이 문화유산을 지키는데 모두 소진되었음을 뜻하는데 결국 선생은 뜰에 서 있던 벽오동나무 둥치를 정성껏 짚으로 싸준 한 달 뒤인 1962년 1월, 57살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일찍 세상을 뜬 것은 돈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은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겠나 하는 짐작들이다.

a 청자상감운학문매병 / 일본인에게서 기와집 20채 값을 주고 샀다가 산값의 배를 준다는 제의도 거절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 일본인에게서 기와집 20채 값을 주고 샀다가 산값의 배를 준다는 제의도 거절했다. ⓒ 샘터

들리는 말로는 문화유산과 관련된 사람 중 선생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다고 한다. 정작 본인은 해방 뒤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남의 어려움은 그냥 보아 넘기지 못했던 선생의 성품을 짐작하는 대목이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켜내는데 정작 자신의 고통은 돌보지 않았던 선생은 진정한 애국자가 아닐까?

간송 선생이 평생을 바쳐 지켜낸 우리의 문화유산은 간송미술관에서 특별전을 할 때면 볼 수가 있다. 광복 60돌에 때맞춰 펴낸 이 책은 김동성님의 그림과 함께 동화책처럼 쉽고 흥미진진한 느낌을 주고 있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간송 선생의 나라 사랑을 되새기고, 우리는 어떤 애국을 할 수 있는지 곰곰 생각해보고 실천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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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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