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하고 현란한 '아리랑' 공연

[평양방문기 ②] '평화3000'의 일원으로 북녘 땅을 밟다

등록 2005.10.18 14:04수정 2005.10.18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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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전,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747 점보여객기 두 대에 나뉘어 타고 평양에 간 대규모 방북단 중에서 '평화3000'의 인원은 180명 정도였고, 우리는 다섯 대의 버스로 움직였다. 그리고 버스마다 북측 안내원이 3명씩 동승했다.

점심식사는 양각도 호텔에서 했고, 저녁식사는 '민족식당'이라는 곳에서 했다. 사사로운 이야기지만 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평화 3000' 이사인 석일웅 수사(修士)의 요청으로 시낭송을 하기도 했다. 평양에 가서도 내 장기(?)인 시낭송을 했다는 얘기인데, 나는 평양의 부자유스럽고도 음울한 분위기를 체감하는 가운데서 내가 누리고 사는 자유스러움과 낭만적인 여유를 북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최대한 발휘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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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식당 저녁식사 자리에서 시낭송도 하고. 남쪽 사람의 자유와 낭만적 여유를 과시하는 것도 같아 북측 동포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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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경기장 안에 먼저 들어와 있는 북의 동포들이 우리 일행을 박수로 맞이하고... ⓒ 지요하


저녁식사 후 능라도에 있는 5·1 경기장으로 이동하여 7시 40분쯤 입장을 마쳤다. 방북단 일행이 자리한 중앙부 옆에는 북한 주민들이 많이 와 앉아 있었다. 남과 북의 동포들은 서로 손을 흔들고 "반갑습니다"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또 더러는 손을 잡기도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맞은편 스탠드를 가득 메운 거대한 회색빛 직사각형 형상이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임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수만 명 사람들로 이루어진 형상이었고, 그 거대한 형상은 곧 갖가지 형태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배경대'가 펼치는 이른바 '카드 섹션'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갖가지 색깔의 카드들을 여러 장씩 지니고 앉아서 번갈아 펼쳐 들어 독특하면서도 조화로운 형태를 만들어 냈다. 거기에는 우선적으로 일사불란함이 필요했다. 정확함과 신속함, 동작의 일치가 생명이었다.

스탠드의 배경대 카드 섹션은 2만 명에 달하는 중학생들이 펼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짧거나 긴 함성을 지르기도 하면서 갖가지 장면들을 연출했다. 정말이지 신속과 정확, 다양함, 정교함의 실체들을 접하며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이 펼쳐 보이는 '락랑' '서성' '만경대' '모란봉' '보통강' '대동강' '평천' '대성' '선교'라는 글자들은 그들의 학교들이 속한 평양시의 각 구역의 이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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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 자리의 반대편 스탠드를 꽉 메운 '배경대'. 처음엔 사람들이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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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대'가 카드 섹션으로 만들고 있는 글자들은 배경대 중학생들의 학교가 속한 평양 시내 각 구역의 이름이라고 했다. ⓒ 지요하

카드 섹션이 20분쯤 진행됐고 8시 정각이 되자 드디어 아리랑 공연이 시작되었다. 정확한 명칭은 '김일성상 계관작품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었다. 숨 쉴 틈을 주지 않는 듯한 요술 같은 변화무쌍함과 현란함에 넋이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전체가 5부로 구성되었고, 각 부분마다 5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명과 공중의 전기 장치와 폭죽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었다. 스탠드의 배경대가 카드섹션을 계속하다가 모두 흰 종이를 들 때는 그 위에 영상물을 쏘아 갖가지 그림들과 글자들을 보여 주었다. 배경대의 카드 섹션과 영상물의 조화는 참으로 신비할 정도였다.

잔디구장에 나와 집단체조와 집단무용에 참여하는 사람은 5만 명이고 그 중에 3만 명이 중복 출연자라고 했다. 2002년 아리랑을 처음 선보일 때는 6개월의 연습기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 노동당 창건 60돌을 맞아 재창작을 할 때는 수정 보충과 함께 3개월의 연습기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나는 아리랑 공연이 진행되는 1시간 20분 동안 거의 무아(無我)지경이었다. 수만 명이 벌이는 집단체조와 집단무용은 참으로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수만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수시로 색상을 바꾸며 순간순간 갖가지 아름다운 장면과 정교한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수없이 찬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모든 이들과 함께 탄성을 발하고 환호를 지르고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보내다가도 스탠드의 배경대 위에 김일성 주석의 모습이 나타나거나 선동적이고 자극적인 구호들이 나타날 때는 몸이 굳곤 했다. 차마 박수를 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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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동안 조선노동당 기에 망치와 낫 그림만 있는 줄 알았다. 망치(노동자)와 낫(농민) 사이에 붓(지식인)도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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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공연 집단 무용의 한 장면 ⓒ 지요하


그것은 다른 이들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더러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공연의 현란한 장면에 감동한 나머지 출연자들을 격려하고 감사하는 뜻으로 박수를 쳤을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일보의 표현처럼 스탠드에 나타나는 김일성 그림이나 구호들을 보고 거기에 부합하는 뜻으로 박수를 친 것은 결코 아니라고 확신한다.

아리랑 공연의 슬픈 이면

잔디구장의 출연진과 스탠드의 배경대를 합해 8만여 명이 동시에 호흡을 맞추는 아리랑 공연은 분명 우리 민족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집단 예술작품인 아리랑 속에는 조선 민족의 고도의 품성과 예지가 담겨 있다. 이것 하나로도 우리 민족이 강하다는 게 드러난다"라고 한 북측 관계자의 말에도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슬픈 것은 왜일까. 나는 아리랑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환상적인 장면에 거듭 찬탄을 머금다가도 언뜻언뜻 가슴을 치는 슬픔에 목이 메는 것을 느껴야 했다. 저 어린 학생들이 6개월 동안, 또 3개월 동안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을까 하는 감상적이고 순진한 슬픔이 아니었다.

저 아리랑 공연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일반적인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불가능하고, 그것은 오로지 전체주의 국가, 즉 전제 국가에서나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었다. 생각하면 공포감도 가지게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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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을 수놓는 오색불빛. 불빛 없는 평양 거리와 대조를 이룬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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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공연 집단 무용의 한 장면 ⓒ 지요하


아리랑 공연 참관을 마치고 양각도 호텔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일행 중 한 명이 앞쪽의 젊은 안내원에게 물었다. 어쩌면 그렇게 수만 명이 일치된 동작으로 다양하고도 정교한 모양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 그것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그러자 젊은 안내원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은 우리 국가의 조직성, 통일성, 집단성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우리 국가의 우수한 조직성과 통일성과 집단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큰 공포감을 삼키는 기분이었다. 조직성, 통일성, 집단성이라는 단어들이 숨 막힐 듯한 답답함과 공포감과 슬픔을 갖게 하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은 조직성과 통일성과 집단성이라는 말에서 내가 느끼는 공포감과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까? 조직성과 통일성과 집단성 저 너머에 있는 자율성과 독립성과 개성이라는 말의 의미와 가치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의문은 참으로 무거웠고, 그 무거운 의문 때문에 나는 더욱 슬픔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안내원에게 누군가가 또 물었다. 아리랑 공연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보수나 수고비가 지급되느냐는 질문이었다.

"우리 공화국의 국가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모든 비용은 국가에서 지출을 합니다. 그리고 국가 행사에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모두 기쁘고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봉사를 합니다."

'봉사'라는 말을 강조한 안내원은 또 이런 말을 했다.

"그래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모든 참가자들에게 일일이 선물을 내리십니다. 제 누이동생도 2년 전에 집단무용에 참가를 했지요.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위대한 장군님께서 내리신 선물을 받았는데, 참으로 예쁜 이불이었지요."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반드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모든 안내원들의 습관이었다. 그는 말을 계속했다.

"그때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나와 동생 모두 밤새도록 위대하신 장군님께서 내리신 이불을 만지고 또 만지고 하면서 감격해 했지요. 그리고 이 이불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의논을 한 끝에 잘 보관해 두었다가 누이동생이 시집갈 때 혼수품으로 주기로 결정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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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공연 집단 체조의 한 장면 ⓒ 지요하


그 말에 버스 안의 일행은 모두 박수를 쳤다. 나도 손뼉을 쳐주었다. 그의 말이 어떤 공감이나 감동을 주어서가 아니었다. 가족이 이불 한 채를 놓고 밤새 만지고 또 만지고 했다는 말이 너무도 애처로운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묘한 감정이었다.

평양의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본 북한의 대집단체조 예술공연 작품 아리랑은 남쪽 사람들에게 중층의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 거의 분명하다. 놀라운 집단 예술작품에 대한 찬탄과 그것을 만들어 낸 전체주의 국가의 조직성, 통일성, 집단성에 대한 야릇한 공포감과 슬픔…. 사실은 중층의 느낌을 의식한다는 것 자체도 슬픈 일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다행스러운 일도 한 가지 있었다. 원래는 아리랑 공연에 인민군이 적군을 격파하는 장면도 있었다고 한다. 그 장면은 인민군이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면서 격투를 벌이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0월 9일 또 한번 와서 공연을 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 장면을 보고는 "요즘 남쪽에서도 참관하러 많이들 온다고 하는데 남에서 온 사람들이 보면 부담을 느낄 수 있으니 빼라"고 해서 다음날 10일부터는 그 장면을 빼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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