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방북은 내일의 통일로 가는 한 걸음

[평양방문기 ⑤/끝] '평화3000'의 일원으로 북녘 땅을 밟다

등록 2005.10.21 11:24수정 2005.10.2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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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안에서 평양 하늘의 저녁놀을 보며

묘향산에서 순안공항까지는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우리 일행은 5시 이전에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순안공항의 모습을 다시 보면서 나는 문득 지난 7월 가족과 함께 이용했던 광주공항과 제주공항의 모습을 떠올렸다. 광주공항이나 제주공항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순안공항의 규모와 풍경에 다시금 연민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a 평양 순안공항 터미널 앞의 간이 판매소.

평양 순안공항 터미널 앞의 간이 판매소. ⓒ 지요하

나는 공항 터미널 앞의 간이 판매소에서 몇 가지 물건을 샀다. 참깨, 참기름, 인삼가루, 참나무버섯에다가 들쭉술 한 병을 사고 34달러를 지불했다. 귀한 물건들이거나 값이 싸거나 해서 산 것은 아니었다. 평양까지 왔다가 집에 빈손으로 들어가는 것은 뭔가 허전할 것 같은 마음도 있었지만, 물건을 조금이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야 인정도 바로 서고 옳은 처신이 될 것 같았다(집에 가서 어머니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a 평양 방문을 마치고 비행기(대한항공 747 점보) 좌석에 나란히 앉은 나와 이석은 수사(인천 대건고등학교 전 교장/가운데)와 동대문문화원 사무국장 권태하 작가

평양 방문을 마치고 비행기(대한항공 747 점보) 좌석에 나란히 앉은 나와 이석은 수사(인천 대건고등학교 전 교장/가운데)와 동대문문화원 사무국장 권태하 작가 ⓒ 지요하

a 비행기 날개 위로 보이는 평양 하늘의 저녁 노을

비행기 날개 위로 보이는 평양 하늘의 저녁 노을 ⓒ 지요하

우리는 모든 수속을 마치고 6시쯤 비행기에 올랐다. 나는 평양에 갈 때나 올 때나 비행기 표의 좌석 번호와 상관없이 목에 거는 표찰 뒤에 적혀 있는 좌석에 앉았다. '43 A' 좌석이었다. 왼쪽 날개 위로 조금 뒤쪽이어서 불편함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 대로 상공에서 북한 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창 밖으로 평양의 저녁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행기 날개 위로 평양의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아름다운 노을 빛에 취하며 나는 문득 불빛 없던 평양의 밤거리들을 떠올렸다. 양각도 호텔 47층 스카이라운지에서 애써 밖을 보며 사진을 찍었던 일도 떠올랐다.

a 양각도호텔 47층 스카이라운지에서 서장석(82·동대문문회원 이사) 어른님, 권태하 작가와 함께

양각도호텔 47층 스카이라운지에서 서장석(82·동대문문회원 이사) 어른님, 권태하 작가와 함께 ⓒ 지요하

a 양각도호텔 47층 회전식당에서 본 평양의 어두운 야경. 몇 개의 불빛이 드문드문 보인다.

양각도호텔 47층 회전식당에서 본 평양의 어두운 야경. 몇 개의 불빛이 드문드문 보인다. ⓒ 지요하

평양에 야경이 없으므로 양각도 호텔 47층 전체가 '회전식당'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는 사진을 몇 장 찍을 수 있었다. 멀리로 드문드문 보이는 몇 개의 불빛을 잘 식별하여 평양의 밤을 겨우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묘향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북측 안내원들의 리더이신 듯한 5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나기환 선생께 북한의 전력 사정에 관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양각도 호텔 47층 스카이라운지에서 평양의 야경을 볼 수 없는 것이 좀 아쉬웠노라고 했다. 그러자 나 선생은 표정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요즘 농촌이 한창 수확기여서요. 농촌의 수확 작업을 도와주기 위해 평양의 전력을 농촌으로 돌리고 있어요. 전력도 나누며 사는 거지요."


그럼 농촌으로 전력을 돌릴 수 있는 송전 시설이 되어 있느냐는 질문을 할까 하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몹시 미안해지는 마음이었다.

그 미안했던 마음은 내 가슴에 일종의 안쓰러움으로 남게 되었다. 비행기 날개 위로 아름답게 번져 오는 서쪽 하늘의 노을 빛에 취하다 보니 연민이 더욱 짙게 내 가슴에 번지는 것 같았고, 문득 5·1경기장의 웅장하고 현란한 아리랑 공연 장면들이 떠올랐다. 잔디 구장의 공연진과 중앙 스탠드의 배경대를 비추며 갖가지 신비로운 색채와 형체들을 만들어 내던 문명의 불빛들….

과학 문명의 그 현란한 불빛 속에서 피사체들은 하나 같이 이상한 어둠 속에 묻혀 있는 형국이었다. 그 무섭고도 기이한 현상을 감지하며, 나는 환상적이기조차 한 집단 예술작품의 성과에 감동한 나머지 힘껏 박수를 치다가도 언뜻언뜻 슬픔을 느끼곤 했었다. 그 슬픔은 내 가슴에 오래 남으리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난생 처음 평양에 왔다가 이상한 슬픔을 한 가슴 안고 가는 기분이었다.


다시 한번 방북의 의미를 살피며

a 아리랑 공연이 펼쳐진 5·1경기장 하늘을 수놓은 오색 불빛. 어두운 평양 거리와 대조를 이룬다.

아리랑 공연이 펼쳐진 5·1경기장 하늘을 수놓은 오색 불빛. 어두운 평양 거리와 대조를 이룬다. ⓒ 지요하

아리랑 공연 관람을 마치고 양각도 호텔 돌아왔을 때 47층 스카이라운지를 가득 메운 우리 일행들 사이에서는 아리랑 공연에 관한 얘기가 단연 주요 화제였다. 거대한 집단 예술작품의 성과와 감동에 대한 얘기들 가운데는 그 집단 예술공연에 동원된 어린 학생들의 고초에 대한 말들도 많았다.

어린 학생들이 감내 해야 했던 오랜 연습 과정의 고초, 그 고역의 내용들을 상상하면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는 말도 있었다. 어떤 중년 여성은 "절절히 가슴이 아프다"는 표현을 했다.

어린 학생들의 고통이 집약되어 있고 인권 유린의 실상이 고스란히 잠재되어 있는 집단 예술작품 아리랑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야만의 표상'이라는 극단적인 말도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다.

사실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 게 아니었다. 방북단 일원의 입에서도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이 다소 의외이긴 했지만, 독재 권력의 폭압으로 만들어지고 수많은 어린 학생들의 고초가 어려 있는 그런 공연을 어떻게 볼 수가 있느냐, 아리랑 보러 갈 돈이 있으면 차라리 불우 이웃돕기나 하라는 따위의 말을 방북 길에 오르기 전부터 주변에서 들은 터였다.

"평양에 가서 수많은 어린 학생들의 고초와 인권 유린의 산물인 아리랑을 보는 것 자체가 죄악이다."

a 아리랑 공연 집단 체조의 한 장면

아리랑 공연 집단 체조의 한 장면 ⓒ 지요하

a 아리랑 공연 마지막 프로그램의 한 장면

아리랑 공연 마지막 프로그램의 한 장면 ⓒ 지요하

언뜻 듣기에는 그럴 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처럼 가혹하고 몰인정한 말은 다시 없을 터였다. 독재 권력의 강압에 의한 것이든 뭐든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고생을 해서 만든 작품인데, 어린 학생들의 고초를 이유로 아리랑 공연을 보지 말아야 한다면, 그들의 그 고생을 그대로 헛고생이 되게 하자는 얘기밖에 안 되는 것이다.

비록 어린 학생들의 눈물겨운 고생의 소산이라 하더라도, 완성된 그 집단 예술작품 공연을 많은 사람들이 봐줘야 그들도 나름대로 보람을 느낄 것이 아닌가. 어린 학생들의 노고가 결집되어 이왕 만들어진 작품이니 가서 보아주고 감탄도 하고 격려의 박수를 쳐주는 것이 옳은 일 아닌가.

여러 가지 이유와 약점 때문에 북한의 지배 권력이 풍부한 관광 자원을 제대로 개발하지도 활용하지도 못하는 현실에서, 그런 놀라운 수준의 집단 예술작품이라도 만들어서 문을 열고 남쪽 동포들과 외국인들을 불러들이니, 외면을 하기보다는 남북교류의 폭을 확대 시키는 계기로 삼는 것이 좀더 현명한 일일 터였다.

어떤 이는 대북지원 단체와 통일운동 단체들이 남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열을 내면서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고 힐난한다. 그것도 되는 대로 내뱉는 말이다. 대북지원 단체들과 통일운동 단체들의 활동은 바로 북한의 인권 개선을 겨냥하는 것이기도 하다. 북한을 상대로 하는 활동 자체가 바로 인권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 활동 속에는 이미 북한의 인권에 대한 모든 열망들이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아리랑 공연을 보기 위해 평양을 간 것이 결코 아니다. 방북 자체에 의미를 두고 방북에 동참했다. 내가 오늘 평양에 가는 것은 내일의 통일을 위한 한 걸음이라는 생각으로, 참으로 엄숙한 마음을 안고 북녘 땅을 밟았던 것이다. 이것은 나뿐 아니라 이번 방북 길에 함께 한 모든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요 마음이리라고 확신한다.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가던 버스 안에서 동대문문화원 사무국장 권태하 작가는 '다시 만납시다'라는 노래를 연습했다. 아리랑 공연의 마지막 장면 때 5·1 경기장 안에 가득히 울려 퍼졌던 북측의 통일노래였다. 음악에 소질이 있는 듯한 권태하 작가는 미리 종이에 적어 온 가사를 주위의 도움으로 고쳐 가며, 그리고 기억을 잘 더듬으며 금세 노래 연습을 완성했다. 그리하여 모든 일행의 박수를 받았다. 버스 중간쯤에 앉은 덕이기도 했다.

권태하 작가가 버스 안에서 불렀던, 그리고 아리랑 공연의 끝판에 5·1 경기장 안에 가득히 울려 퍼졌던 '다시 만납시다'라는 노래를 그리운 마음으로 상기해 본다.

백두에서 한라로 우린 하나의 겨레
헤어져서 얼마냐 눈물 또한 얼마였던가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어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이 긴 글의 서두에 밝혔듯이 나는 '평화3000'의 일원으로 방북을 했다. 평화3000(이사장/천주교 인천교구 호인수 신부) 집행부는 이번 방북 행사를 마치고 나서 방북 길에 함께 했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 메일을 보냈다.

그 메일의 일부 내용을 그대로 옮겨 소개하는 것으로, 다섯 번으로 나누어 올린 '평양방문기'를 마친다.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린다.

평화3000이 생각하는 통일의 시작은 '만남'입니다.
만남은 남과 북이 서로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만남은 수십 년 간 떨어져 있어 생겨난 편견들을 인정하고 극복하는 자리입니다.
평화3000은 이번 방북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안의 잘못된 인식들을 털어 버리고, 남과 북이 함께 하는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평화3000은 평화로운 공존의 미래를 염원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나눔의 공간이자 참여의 공간입니다.
나눔을 통한 화해와 평화의 세상을 지향하며 펼치는 평화3000의 모든 활동에 여러분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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