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물드는 묘향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평양방문기 ③] '평화3000'의 일원으로 북녘 땅을 밟다

등록 2005.10.19 12:08수정 2005.10.19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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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 가는 길

14일 아침에 우리는 여장을 챙겼다. 아침식사 후 곧바로 버스에 올랐다. 평양에서 묘향산까지는 버스로 2시간쯤 걸린다고 했다.

평양에서 묘향산까지 고속도로가 놓여져 있었다. 청천강의 맑은 물도 볼 수 있었고, 한적한 농촌 풍경이며, 서해선 기찻길이며, 물가에서 낚시를 하거나 그물로 고기를 잡는 사람들의 한가로운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헐벗은 산들이 많았다. 높은 산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야산들은 거의 나무가 없었다. 내 옆자리에 동승한 또 한 명의 젊은 안내원에게 연료 사정을 물으니 농촌에서는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때고 산다고 했다. 취사와 난방 연료를 계속 나무에 의존한다면 산림은 더욱 피폐해지고, 앞으로 연료 사정도 심각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 안에서는 남한의 연료 상황에 대한 얘기가 잠시 화제로 떠올랐다. 남한에서는 오래 전에 거의 모든 집에서 재래식 부엌이며 아궁이들이 사라졌다. 농촌에서도 나무를 때고 사는 집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집들이 취사는 가스로, 난방은 석유로 해결하며 산다. 산에서 나무를 해 오지 않으니 산에는 낙엽이 수북수북 쌓이고, 산불이 나기 좋은 조건이 된다. 산불이 났다 하면 순식간에 큰불로 번진다. 산불은 헬기가 아니면 끌 수도 없고….

부엌이며 아궁이가 사라진 사정과 관련하여 동대문문화원 사무국장인 권태하 작가가 재미있는 말을 했다.

"우리도 옛날처럼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때고 살아야 해요. 그래야 여자들도 자궁암이 생기지 않아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한참씩 불을 때면 자궁 쪽으로 원적외선을 쪼여서 자궁암 예방이 되고 애도 잘 낳게 되는데, 요즘 여자들 아궁이 앞에 앉지를 않고 사니까, 자궁 근종 없는 여자들이 없어요."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북측 젊은 안내원도 따라서 웃는데, 쓸쓸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나는 절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대문문화원 이사이신 서장석 어른님이 "아무리 보아도 묘(墓)를 하나도 볼 수가 없는데, 모두 화장을 하느냐"라는 질문을 했다. 화장도 하고 매장도 하지만, 묘의 봉분 높이를 20cm로 한다고 했다. 20cm라면 평토나 다름없으니 묘들이 보이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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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을 가며 본 북한의 한 농촌 풍경. 논바닥에 베어진 벼들이 이삭이 달린 채로 뉘어져 있다. 야산들은 헐벗은 형국이고... ⓒ 지요하

벼 베기를 마친 논들이 많았다. 여러 사람이 낫으로 벼 베기를 하는 풍경도 볼 수 있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벼 베기가 시작되지 않은 남한의 농촌보다 한 걸음 빠른 상황이었다. 그런데 논마다 볏단들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이삭이 달린 채로 논바닥에 뉘어져 있는 벼들도 있었다. 햇볕에 말리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햇볕에 말린 다음 탈곡을 한다고 했다.

"저렇게 논에다 볏단들을 쌓아 놓고 있으면 들쥐들한테 빼앗기는 양도 꽤 많겠군요."

나는 걱정을 하며, 북측 젊은 안내원에게 남쪽의 농촌 상황을 소개해 주었다. 남한의 농촌에서는 낫으로 벼 베기를 하는 풍경을 보기가 어렵다. 골짜기 작은 다랑이논들을 제외하고는 이앙기로 모를 심고 콤바인으로 벼 베기를 한다. 콤바인은 벼 베기와 탈곡까지 한꺼번에 다한다. 기계 안에서 털린 벼들은 그대로 포대에 담겨지기까지 한다.

그 얘기를 하다가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북측 젊은 안내원에게 한없이 미안해지는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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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묘향산으로 가는 고속도로. 휴게소가 없어 길에다 차를 세우고, 담배도 피우고 볼일도 보고 했다. 여자들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도 가져야 했고... ⓒ 지요하

이윽고 버스들이 잠시 정차를 했다. 평양과 묘향산의 중간 지점이라고 했다. 휴게소가 아니었다. 그냥 한적한 길가였다. 평양과 묘향산을 잇는 고속도로에 휴게소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몸으로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남자들은 모두 내려서 담배도 피우고, 몇 걸음 자리를 옮겨서 소변을 보기도 했다. 고속도로에 휴게소가 없어도 남자들은 별 문제가 없지만 여자들은 괜히 또 한번 남자들이 부러울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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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묘향산 간 고속도로 풍경. 텅 빈 도로에 멀리로 차 한 대가 보인다. ⓒ 지요하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우리가 정차해 있는 동안 우리 곁을 지나간 차량은 한 대였다. 반대편 차선을 지나간 차량은 두 대였나…. 그렇게 텅 빈 고속도로가 이상한 적막감과 함께 내게 공연히 슬픈 심정마저 갖게 하는 것 같았다.

향산의 묘(妙)함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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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 앞에서 만난 북한 관람단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 지요하

우리 일행은 오전 10시 40분쯤 묘향산의 국제친선관람관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참배'를 하러 온 여러 그룹의 북한 인민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과 손을 흔들며 더러는 악수도 하며 인사를 나누곤 했다. 그들은 학생들처럼 열을 지어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기에 바쁜, 대열(隊列) 개념이라고는 아예 없는 우리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방금 '참배'라는 단어를 썼다. 처음에는 북한 주민들이 국제친선관람관을 '관람'하러 온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들은 관람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참배를 하러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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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김정일기념관) 전경. 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 지요하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은 두 개의 건물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 거리는 100m쯤 되었다. 묘향산 쪽으로 안쪽에 있는 건물은 김일성이 외국의 인물들로부터 장장 50년 동안 받은 26만여 점의 선물들을 전시 보관하는 곳이고, 바깥 쪽에 있는 건물은 김정일이 받은 5만여 점의 선물들을 전시 보관하는 곳인데, 규모는 비슷한 것 같았다.

외국의 수많은 정상들과 사절들, 주요 인물들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전시 보관하는 곳이어서 '국제친선관람관'이라고 이름 붙인 것 같은데, 사실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기념관인 셈이었다. 그러므로 그곳은 북한 인민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이고, 또 그러므로 관람이 아닌 참배를 해야 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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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김일성기념관) 전경. 안에는 김일성 밀랍상이 있는 방도 있다. ⓒ 지요하

기념관의 규모가 비슷한 것은, 김정일 기념관 안에 소장되어 있는 물품들이 현재는 5만여 점이지만 앞으로도 많이 늘어날 터이므로 미리 공간을 확보해 놓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원래는 1978년에 지어진 김일성 기념관 안에 김정일의 것도 함께 있었는데 2001년 김정일 기념관을 따로 지어 분리를 해놓았다고 했다.

두 기념관 모두 같은 형태의 웅장한 한옥식 건물이었다. 6층 높이에 정문 한 짝의 무게만도 4톤이라고 했다.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지어진 으리으리한 건물은 사람들에게 강한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먼저 김정일 기념관 안으로 들어간 우리(7조와 8조 약 40명)는 안내원실에 카메라들을 모두 맡겨야 했고, 여성 안내원이 나누어주는 헝겊 덧신을 신고 소리나지 않게 걸어야 했고, 모자를 벗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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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김일성기념관) 안의 기념품 판매소 ⓒ 지요하

우리는 기념관 안에서도 여러 그룹의 북한 인민들을 볼 수 있었다. 건물 안의 그들은 더욱 질서정연했다. 이곳에 오기 위해 옷차림에 단단히 신경을 쓴 모습들인 그들은 안내원의 설명을 들을 때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군대처럼 정확하게 오와 열을 지어서 전체적으로는 정사각형 형태를 취하곤 했다. 또 이동을 할 때는 정확히 두 줄로 열을 짓곤 했다.

안내원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이리저리 멋대로 움직이는 우리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그들의 군대 같은 모습을 보며 나는 아릿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앞길을 양보할 때는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꼭 하곤 했다.

김정일 기념관의 한 방에는 커다란 김정일 석고상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형상이었다. 그 방에 들어갔을 때 여성 안내원은 김정일 석고상 앞으로 가서 구십 도로 허리 굽혀 절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저는 하루에 여러 번씩 위대하신 장군님께 절을 올립니다. 그러니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생활이겠습니까. 하루 종일 위대하신 장군님을 모시고, 늘 장군님과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답니다."

그녀는 김정일이 받은 선물들을 설명할 때마다 선물을 한 사람의 이름과 선물 시기를 말한 다음에는 반드시 "장군님께 올렸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하여 김대중 대통령도,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김정일에게 선물을 '올린'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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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김일성기념관) 앞에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북한 주민들. 신의주에서 왔다고 했다. ⓒ 지요하

이윽고 우리는 김일성 기념관으로 이동했다. 안내원은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김일성 기념관의 여러 개 방을 보여준 다음 어떤 한 방에 이르러서는 긴장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좀더 정숙해 주기를 요구했다. 그리고 육중한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방 안에는 김일성의 밀랍상이 있었다. 한 손을 반쯤 들고 서 있는 형상이었다. 전기 장치에 의한 특이한 붉은 불빛이 그 밀랍상을 은은히 감싸고 있었다. 나는 여성 안내원이 우리를 왜 이 방으로 안내했는지를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앞쪽에 위치했던 나는 슬금슬금 몸을 뒤로 빼었다.

여성 안내원은 우리에게 오와 열을 짓도록 요구했다. 우리 일행은 일단 안내원의 요구대로 김일성 밀랍상 앞에서 오와 열을 지었다. 그러자 여성 안내원은 우리에게 예를 올리기를 요구하면서 자신부터 김일성 밀랍상을 행해 구십 도로 허리를 굽혔다.

우리 일행은 아무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냥 꼿꼿이 서 있었다. 그것은 이십대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맨 뒤에서 우리 일행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아무도 김일성 밀랍상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이 대목과 관련하여 조선일보에 전하고 싶다. 조선일보는 절대로 걱정을 하지 말기를…).

결국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이라는 이름의 김일성 김정일 기념관은 그들 부자(父子)의 신격화를 위한 것이었다. 전체 인민들로 하여금 주기적으로 참배케 함으로써 김일성 김정일 부자에 대한 신비감과 외경심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효과적인 통치술의 한 방편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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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김일성기념관)에서 바라본 묘향산 한 자락 풍경. 어느덧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고 있다. 건물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은 움직이지 않지만 바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고... ⓒ 지요하

김일성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카메라를 되찾은 우리는 맨 위층 전망 좋은 공간으로 올라가 앉아서 묘향산의 해맑은 풍경을 감상하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나는 더욱 착잡한 심정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불빛 없는 평양의 밤거리와 어젯밤 5·1 경기장에서 넋을 놓고 보았던 화려한 아리랑 공연이 대비되는 그림만 내 뇌리에 있었다. 그 엄청난 부조화 하나만으로도 내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런데 북한 땅의 이런저런 낙후된 풍경들 속에서 매우 이질적인 형태로 돌출되어 있는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이라는 이름의 웅장한 한옥식 건물들을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 참혹한 대비와 부조화, 모순과 이율배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나는 다시금 슬픈 심정이었다.

북한 땅의 이런저런 낙후된 풍경들보다도 5·1 경기장의 아리랑 공연과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이 내게 더욱 큰 아픔을 준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깊이 인식하면서 나는 망연한 눈으로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묘향산을 잠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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