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장관-검찰, 누가 기본에 충실했나

[뉴스가이드] 물고물리는 혼전... 한나라-검찰 '과거'도 드러나다

등록 2005.10.19 09:58수정 2005.10.1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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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기준은 무엇일까? 천정배 법무부장관의 수사지휘권 행사에 반발해 사표를 제출한 김종빈 검찰총장이 17일 오전 퇴임인사차 과천 법무부장관실을 방문한 뒤 천정배 장관의 배웅을 받고 있다. 모두 '최선을 다했다'는 두 사람. 과연 누가 '기본'에서 더 멀어져 있을까?

기준은 무엇일까? 천정배 법무부장관의 수사지휘권 행사에 반발해 사표를 제출한 김종빈 검찰총장이 17일 오전 퇴임인사차 과천 법무부장관실을 방문한 뒤 천정배 장관의 배웅을 받고 있다. 모두 '최선을 다했다'는 두 사람. 과연 누가 '기본'에서 더 멀어져 있을까? ⓒ 오마이뉴스 권우성

혼전양상이다. 천정배 법무장관의 '과거'가 밝혀지더니 이번엔 천 장관의 '과거'를 폭로한 한나라당과 검찰의 '과거'도 공개됐다. 물고 물리는 형국이다.

참여연대가 2001년에 지휘권 삭제를 골자로 한 검찰청법 개정안을 입법청원했을 때 천 장관이 이를 적극 지지했다고 폭로한 한나라당은 어제 열린 국회 법사위에서 96년 국정감사 때에도 천 장관이 지휘권 삭제를 강력히 요구했다고 공격했다.

이에 대해 천 장관은 당시는 검찰이 권력에 휘둘렸고 지금은 정치적 독립성이 확보됐기 때문에 입장을 달리할 수 있다고 맞받아쳤다.

이 광경을 지켜본 일부 언론은 날을 세웠다. <조선일보>는 천 장관을 "동일한 법에 대한 해석을 정권의 편의에 따라 그때그때 말을 달리 하는 사람"이라며 "법무장관의 말 바꾸기는 다른 장관의 식언과 달리 법을 삼키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중앙일보>도 "야당일 적과 집권당일 때의 논리가 정반대인 인물이 무슨 말을 한들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라며 천 장관을 "청개구리"에 비유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동아일보>는 판가름 성격의 새로운 사실을 제시했다. 천 장관이 2003년 국정감사 때 송두율 교수 처리 문제를 두고 법무장관의 수사 개입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는 것. "검찰이 누구의 간섭이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너나없이 '그때 그때 달라요' 손가락질해봤자 전신거울


<동아일보>의 이 보도는 결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천 장관이 어제 국회 법사위에서 펼친 '상황론'을 허물만한 근거처럼 보인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새 사실을 전할 때 <경향신문>도 또 다른 사실을 전했다. 때에 따라 입장을 바꾼 이가 천 장관만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천 장관이 지휘권 삭제를 주장한 96년 국감 24일 전에 국회에서 열린 '검찰청법 개정 공청회'에서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과 검찰의 진술인으로 나온 이훈규 당시 부장검사가 지휘권을 삭제하면 자칫 '검찰파쇼'가 될 공산이 있다면서 "장관이 구체적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마저 지휘·감독할 수 없다면 책임행정의 측면에서 부당하다"고 주장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행위의 정당성을 둘러싼 우열논쟁은 소멸됐다. 너나 할 것 없이 '그때 그때 달라요'를 합창해온 사실이 밝혀진 만큼 손가락질은 부질없는 일이 돼 버렸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 바로 전신거울임이 확인됐다.

그렇다고 냉소를 보낼 필요는 없다. 논쟁에서 소모적인 측면을 걷어내기 위해선 이 점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과거나 현재나 법무장관의 지휘권 조항은 논쟁대상이 되어왔다는 사실, 달리 말하면 절대기준을 내세울 만큼 명약관화한 사안이 아니라 법리논쟁이 거듭되는 사안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렇게 추리고 나면 논점은 좁혀진다. 행위의 정당성이 아니라 적절성이 핵심이다. 법리논쟁이 있으므로 법무장관의 지휘권이 남용돼서는 안 된다는 점도 제기될 만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천 장관 스스로 동의를 표명한 상태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핵심은 기왕 행사된 지휘권이 적절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경향신문>은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가 이번의 수사권 발동을 '합당한 조처'로 규정했던 것은 검찰권에 대한 문민통제적 측면 외에도 인신구속의 남용에 제동을 건 사실에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천 장관의 지휘권 발동을 '국가 정체성 훼손'으로 규정하는 일부 언론에게 이런 '당연한 평가'가 설득력을 가질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천 장관의 지휘권 발동을 인권보호보다는 국가보안법 사문화를 노린 정략으로 보기 때문이다.

a 천 장관이 2003년 국정감사 때 송두율 교수 처리 문제를 두고 법무장관의 수사 개입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고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천 장관이 2003년 국정감사 때 송두율 교수 처리 문제를 두고 법무장관의 수사 개입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고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 <동아일보> PDF

a 96년 국회 '검찰청법 개정 공청회'에서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과 검찰의 진술인으로 나온 이훈규 당시 부장검사가 지휘권을 삭제하면 자칫 '검찰파쇼'가 될 공산이 있다면서 "장관이 구체적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마저 지휘·감독할 수 없다면 책임행정의 측면에서 부당하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

96년 국회 '검찰청법 개정 공청회'에서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과 검찰의 진술인으로 나온 이훈규 당시 부장검사가 지휘권을 삭제하면 자칫 '검찰파쇼'가 될 공산이 있다면서 "장관이 구체적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마저 지휘·감독할 수 없다면 책임행정의 측면에서 부당하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 ⓒ <경향신문> PDF

조선일보가 제시한 '원론' 살펴보자

그럼 접점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방법은 '원론'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때마침 <조선일보>가 제시한 게 있다.

<조선일보>는 어제, "법과대학생 수준의 지극히 원론적이고 당연한 말"을 제시했다. 김종빈 전 검찰총장의 이임사가 그것이다. <조선일보>가 "이론을 달기는 힘들" '원론'으로 제시한 김 전 총장의 말은 두 가지다.

"현실적으로 국보법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으므로 검찰은 (국보)법을 위반한 사항에 대해서도 다른 사항들과 같이 구속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역대 장관들이 (법에 검찰 지휘권 규정이 있는데도) 행사를 자제한 것은 규정의 존재 자체로 상징적 역할을 다 하는 것이고 그것을 행사하면 정치적 중립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원론'으로 치켜세웠지만 곰곰이 뜯어보면 이율배반이 발견되는 게 김 전 총장의 말이다.

김 전 총장은 현존하는 두 개의 법률, 국보법과 검찰청법에 대해 이중 잣대를 내세웠다. 국보법에 대해서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으므로" 적용해야 한다면서도, 국보법과 마찬가지로 멀쩡히 효력이 살아있는 검찰청법에 대해서는 적용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이중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김 전 총장은 각각 "다수의 국민들이 불안을 느끼니까"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 훼손될 우려가 있으니까"란 근거를 댔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하나는 상황론이요, 다른 하나는 원칙론이다. <조선일보>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코걸이 귀걸이' 논법이다.

김 전 총장은 이런 말을 하기에 앞서 대전제를 달았다. "검찰은 법을 지키는 기관으로서 사회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그 변화가 기본에서 멀어져갈 때 속도를 조절하고 방향을 잡아주어야 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런 대원칙은 검찰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런 대원칙은 법무장관도 향유할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돼 있다. "검찰이 기본에서 멀어져갈 때 법무장관은 속도를 조절하고 방향을 잡아주어야 한다"는 원칙은 천 장관의 '과거'를 폭로했던 한나라당마저 인정한 것이다.

천 장관의 '과거'를 폭로한 장윤석 의원은 어제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검찰이 위법적인 방법이나 심히 부당하다고 판단되는 방법으로 수사를 할 때 법무장관의 지휘권은 발동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기본에서 멀어져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a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의 '강 교수 신병처리방안' 보고서를 단독 보도한 <한겨레> 기사.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의 '강 교수 신병처리방안' 보고서를 단독 보도한 <한겨레> 기사. ⓒ <한겨레> 지면

이제 정리하자.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천 장관의 지휘권 발동이 적절했는가를 재는 기준을 공유하는 것이다. 즉 강정구 교수에 대한 구속수사 입장이 "기본에서 멀어져갈 때" 또는 "심히 부당하다고 판단되는 방법으로 수사를 할 때"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가르는 일이다.

<한겨레>의 보도는 이 기준을 재는 중요한 단서다. <한겨레>가 단독 입수해 보도한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의 '강 교수 신병처리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검찰은 강 교수를 구속해야 하는 이유로 ▲동종 범죄에 대한 엄벌 ▲인터넷 여론조사 결과 사법처리 의견 70% 상회 ▲반국가사범 처벌에 대한 검찰의 강력한 의지 표명 등 세 가지를 꼽았다.

검찰은 그러면서도 "강 교수가 교수 신분이고 증거가 이미 확보됐으며, 경찰 조사에 순순히 응하는 등 도주·증거인멸 우려가 없어 불구속 수사 원칙에 충실할 수 있다"고 적시했다. 심지어 "법원이 이미 ('만경대 사건'과 관련해) 강 교수를 보석으로 석방한 바 있어 도주·증거인멸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할 우려가 높다"고 전망하기까지 했다.

"법과대학생 수준의" 법 상식에 비춰보면 불구속 수사를 해도 무방한 사건에 대해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 굳이 구속코자 했던 검찰, 검찰의 이런 태도가 부당하다고 판단해 수사는 하되 구속은 하지 말라고 지휘한 천 장관…. 둘 중에 누가 "기본에서 멀어져" 있었을까.

굳이 "법과대학생 수준"을 언급할 것도 없이 국민의 법 상식으로도 충분히 판단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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