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삐삐를 1010235012"

[추억 속 통신수단②-삐삐] 첨단시대 호출기만 고집하는 별난(?) 사람들

등록 2005.10.25 11:18수정 2005.10.2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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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의 발달과 경제성장은 우리에게 전자우편과 휴대폰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선물했다. 이로 인해 현대인의 속도와 간편성 추구는 더욱 가속화했다. 그러나, '느려서 아름다운 것들'도 있는 법. <오마이뉴스>는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통신수단인 편지, 공중전화, 삐삐(무선호출기)를 추억함으로써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숨가쁘게 달려가는 시대에 쉼표 하나를 찍고자 한다. 두 번째 기획으로 90년대를 풍미했던 통신수단인 삐삐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주>
a 90년대 통신시장을 풍미했던 삐삐들.

90년대 통신시장을 풍미했던 삐삐들. ⓒ 윤태

'012-332-XXXX'

생소하게도 012로 시작되는 번호 10자리 숫자를 차례로 눌렀다. 어떤 번호일까 의구심도 잠시, 수화기에서는 추억속의 친절한 도우미 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삐삐호출은 1번 음성녹음은 2번…." 거의 6년만에 다시 듣는 소리였다.

2번을 눌렀다. '삐~' 소리와 함께 상대방 음성 사서함에 내 목소리를 남길 기회가 주어진다. 그런데 하도 오랜만이라 여러차레 '버벅거리기'를 반복하다보니 녹음 시간이 금새 지나가 버린다. 빨리 끝내라는 경보음이 '삐~삐~' 울렸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희미한 옛기억을 되살려 재빨리 전화기의 별(*)표를 '더블클릭'했다. 친절하게도 녹음시간이 연장됐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상대방이 내가 남긴 용건을 확인하고 연락이 오기를.

첨단 휴대폰 홍수속 '생명연장의 꿈'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휴대전화 세대에게는 대단히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느껴지겠지만 아직도 삐삐만을 고집하고 있는 별난(?)사람들이 있다. 휴대폰에 묻혀 사는 보통사람들에게는 누군가에게 연락을 할 때 011, 016, 019도 아니고 그렇다고 017, 018, 010도 아닌 012를 마지막으로 누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말이다.

한때 1500만 가입자를 모았던 삐삐의 '신화'는 휴대폰에 밀려 '전설'이 된지 오래다. 하지만 전국에 남아있는 삐삐 사용자는 아직 건재하다. 그 숫자도 3만5000명이 넘는다. 삐삐없으면 못사는 이들 마니아들로 인해 카메라폰, DMB폰 등 첨단 휴대폰의 등등한 기세 속에서도 삐삐의 '생명연장의 꿈'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시대를 떠오르게 만드는 삐삐의 질긴 생명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직도 옆구리에 찬 삐삐에 애정어린 눈길로 예찬론을 늘어놓기에 여념이 없는 이들을 만나보자.

회사원 김종석(32)씨는 얼마 전 여자친구에게 삐삐를 선물했다. 직접 전화로 통화하는 것 보다 서로의 음성 사서함에 사랑의 속삭임이나 함께 듣고 싶은 음악 등을 서로 나누는 애틋함을 주고 싶어서였다. 김씨는 "특히 여자친구와 싸웠을 때 삐삐에 화해와 사랑의 음성 메시지를 남기면 여자친구의 냉랭했던 마음이 눈녹 듯 사라진다"며 "여자친구도 대학생 때 삐삐에 얽힌 추억을 떠올리며 무척 좋아한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게다가 '1010235012'(열열이 사모 영원히)나 '177155400' (I miss you : 보고 싶어) 등 숫자를 이용한 '삐삐약어'를 여자친구에게 보내 점수를 따는 것은 덤이다.

왜 그들은 삐삐를 예찬할까?

a 커플 삐삐

커플 삐삐 ⓒ 윤태

너무나 발전 속도가 빠른 디지털 기술의 홍수 속에서 옛 삐삐문화의 향수도 빼놓을 수 없는 인기 비결이다. 느림의 미학을 즐기려는 이들에게는 시도때도 없이 괴롭히는 스팸전화로부터 자유롭고 '부르르' 떨리는 진동이나 호출음을 듣고 전화부스로 달려가는 동안 느끼는 설렘까지 주는 삐삐는 수십만원 짜리 최첨단 휴대전화 부럽지 않다.

95년 처음으로 삐삐를 구입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는 박진기(31)씨는 "요즘 휴대전화는 벨이 울리면 발신자 번호표시로 누구 전화인지 바로 알 수 있어 받는 재미나 설레임이 없다"며 "하지만 삐삐는 모르는 번호가 찍혔을 때 궁금증이 생기고 메시지를 확인하기까지 기다림과 설렘이라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 좋다"고 예찬론을 펼쳤다. 특히 "요즘엔 휴대전화 때문에 공중전화 부스가 많이 없어지는 바람에 찾기 힘들어져 설렘이 두배가 됐다"고 여유를 보였다.

또 90년대 중반만 해도 신세대들로부터 받고 싶은 선물 1위였던 삐삐는 당시의 추억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보물상자다.

삐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삐사모 cafe.daum.net/ilovebeeper)의 운영자인 강동욱씨는 "처음 삐삐를 샀던 날 처음으로 메시지를 남긴 친구, 고민을 얘기했던 친구, 군대 문제로 고민 된다며 친구가 남긴 메시지 등 여러 가지 추억들이 모두 삐삐 안에 있다"며 "대학 때의 모든 추억들은 삐삐와 함께 있다"고 삐삐를 고집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편리한 휴대전화보다 삐삐가 더 대접받는 곳도 있다. 첨단 의료기기가 모여있는 병원에서는 휴대전화의 주파수가 기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휴대전화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다. 또 늘 화재의 위험이 있는 정유공장에서는 배터리의 폭발 위험 때문에 휴대전화는 절대 출입 금지다. 그래서 의사들과 정유공장 직원들은 휴대전화 대신 삐삐가 생활 필수품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삐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리얼텔레콤의 한상진 팀장은 “현재 가입자 중에는 개인 가입자들도 많지만 업무 특성상 휴대전화 사용이 어려운 기업에서 일괄적으로 가입한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이제 삐삐는 또 한번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지금의 호출·음성 서비스 외에 교통정보와 증권정보 데이터까지 받아볼 수 있는 시대친화적인(?) 삐삐로 거듭나려는 것이다.

"사업이 커지지도 않겠지만 중단되지도 않을 것"

리얼텔레콤은 지난 4월 증권정보 서비스에 이어 무선호출망(삐삐망)을 통해 2분간격으로 서울·수도권, 대구권 시내교통 정보와 전국 고속도로 및 우회국도의 교통 상황을 알려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별도의 추가 통신 비용없이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12개 사업자가 치열하게 경쟁하며 가입자를 모집하고 대학에서는 쉬는 시간 누군가로부터 온 음성메시지를 확인하려 공중전화 앞에 길게 줄을 서던 삐삐의 전성기는 다시 오기 힘들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변신을 거듭하는 디지털 기술의 역기능과 거기서 나오는 스트레스가 계속되는 한 느리지만 여유와 기다림의 미학을 만끽할 수 있는 삐삐의 존재가치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상진 팀장은 "삐삐 사업자체로는 수익성이 없고 전국망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에 부담이 되지만 현재 남아있는 가입자들은 삐삐를 정말 좋아하는 분들"이라며 "삐삐 사업이 커지지도 않겠지만 중단 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교통정보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 수익성을 확보해 나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삐삐 갖고 싶다고요?

휴대전화에 싫증이 났거나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삐삐에 가입해 보는 것도 고려해볼 만 하다. 현재 국내에서 삐삐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는 단 한군데 리얼텔레콤 뿐이다.

삐삐를 한달 사용하는데 드는 비용은 기본요금 8000원에 음성사서함 등을 이용하면 추가로 2900원을 더 내면 된다. 세월이 흘렀어도 요금은 거의 오르지 않은 셈이다.

리얼텔레콤에 따르면 순수 삐삐 서비스 가입자는 현재 3만5000여명 정도. 삐삐 사용에 싫증을 느끼고 해지하는 고객들도 있지만 신규가입자가 꾸준해 이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달 평균 신규 가입자는 500여명에 이른다.

가입하려면 우선 삐삐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다. 하지만 국내에서 내수용 삐삐 제작은 중단된 상태다. 미국만 해도 아직 삐삐 가입자가 1100만에 달해 사업성이 충분하지만 국내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텔이 삐삐를 생산하고 있지만 이는 100% 수출용이다. 수출용은 주파수가 달라 국내에서 사용하지 못한다.

재고품이 남아있긴 하지만 원하는 삐삐를 구하기 위해서는 온라인 쇼핑몰이나 동호회를 통하거나 주문생산을 하는 수밖에 없다. 특히 리얼텔레콤은 대리점을 영업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직접 문의 해야한다.

삐삐를 구해 개통했다면 온라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동호회에 가입해 정보를 나누고 추억을 나누는 것도 권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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