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센머리, 제주바람에 흩날리다

산굼부리 억새꽃밭에서 외할머니를 그리며

등록 2005.10.28 09:17수정 2005.10.2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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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가게 앞을 지나는데 빨갛게 익은 홍시가 눈에 띄었다.


“아줌마! 저 홍시은 얼마예요?”
“예에, 한 바구니에 5천원이우다!”

홍시 값을 흥정하려니 할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으로부터 20년이 훨씬 지난 이야기다. 육지에서 갓 시집 온 새댁에게 집안의 가장 어르신은 외할머니셨다. 외할머니는 늘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파란 잔디를 혼자 지키고 계셨다. 할머님께서 제일 잘 드시는 것은 물렁물렁한 홍시, 이가 없으시니 오물오물 씹어 삼키는데는 홍시가 최고였다.

김강임
아흔을 넘기신 할머니의 머리가 은발이셨다. 은발의 할머니에게 홍시 서너 개를 사들고 가면 늘 파란 지폐 한 장을 내 호주머니에 넣어 주셨다. 홍시 값을 배로 돌려 주신 것이다. 아무리 뿌리쳐도 "손주며느리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래…" 하시며 늘 나를 격려해 주셨던 할머니.

그때 홍시를 사 들고 할머니 댁에 들어서면 할머니는 늘 마루 한가운데 앉아서 참빗으로 센머리를 곱게 단장하셨다. 할머니는 머리카락도 별로 없으신데 왜 하루에도 몇 번씩 은발의 머리를 곱게 단장하셨을까? 할머니는 센머리를 곱게 단장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빚어 넘겼으리라. 그러나 그때 나는 몰랐다. 할머니가 센머리를 넘기며 지나간 청춘을 그리워하셨던 까닭을.

그런데 벌써 내 머리에는 할머니의 센머리가 하나 둘 내려 앉았다. 처음 할머니의 센머리 하나가 눈에 띄었을 땐 그 머리카락을 뽑아 내려 안간 힘을 썼다. 그러나 차츰 앞머리에 무더기로 센머리가 이사를 오고 있으니 이제는 손 쓸 재간이 없다.


김강임
제주의 중산간도로를 달리다가 오늘은 산굼부리로 발길을 향했다. 해질녘 산굼부리에는 억새의 군무가 환상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분화구 등성이에는 할머니의 센머리가 남실거린다. 아니 할머니의 센머리가 흐느낀다.

김강임
은빛 넘실대는 억새밭 길을 걷다가 센머리를 단장 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구의 숨구멍 등성이에 가지런하게 피어있는 은발의 억새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할머니의 센머리는 나부끼는 듯하다. 늘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검은 머리를 탐내셨던 할머니. 그때 나는 할머니의 센머리를 왜 그렇게 무심했던가?


이제 할머님은 떠나시고 세월이 흘러 내 머리에 할머니의 센머리가 내려앉으니 억새 꽃 밭에는 늙어도 늙어도 변하지 않는 할머니의 센머리가 가득하다.

김강임
백록담의 깊이보다 더욱 깊은 산굼부리 분화구에도 할머니의 센머리가 바람에 춤을 춘다. ‘굼부리’ 산책로 억새 꽃밭은 참빗으로 가르마를 타시고 동백기름을 자르르 발라 비녀를 꽂으셨던 할머니의 낭자머리가 은빛으로 물들었다.

김강임
지금 화구의 숨구멍에는 허옇게 할머니의 센머리가 늙어가고 있다. 그리고 할머니의 센머리는 내 머리에 하얀 핀을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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