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적어도 백 번은 웃게 한다

문제아가 바라본, 거짓으로 가득한 어른들의 세계

등록 2005.11.04 16:57수정 2005.11.04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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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 작.

<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 작. ⓒ 문학사상사

어느 날 지하철을 탔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봤는데, 팔에는 쇠사슬 같은 걸 주렁주렁 걸고 노랗고 빨간 염색을 한 청소년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중년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도 빠짐없이 채우고(목 단추 하나쯤 열어놓으면 덜 답답해 보일 것 같았다)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청소년은 누가 봐도 문제아로 비쳐졌고, 중년 여자는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그렇다고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으로 비쳤다.

그런데 껄렁해 보이는 젊은 애보다 그 옆의 중년여자를 보면서 이상하게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기주의와 편견에 가득 찬 그런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 여자에게서 내 모습을 확인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불량 청소년으로 보이는 젊은 애가 오히려 순수하고 열린 사람으로 생각되면서 호감 비슷한 걸 느꼈다.


샐린저가 쓴 <호밀밭의 파수꾼>은 껄렁한 청소년의 위선적인 어른에 대한 관찰기다.

벌써 다섯 번째 읽고 있는 책이다. 한 번 읽으면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는 게 나의 독서성향인데, 예외적 경우다. 회색 구름이 낮게 덮여 있는 것처럼 잔뜩 찌푸린 기분일 때 읽게 되고, 인간관계가 제대로 풀리지 않아 심사가 몹시 꼬여 있을 때도 읽는다. 모두 웃음이 필요한 시간이고, 그때마다 내가 바란 대로 실컷 웃게 만들어 주었다.

이 책의 장점은 바로 웃음이다. 한 페이지에 한 번은 꼭 웃게 만든다. 시시한 유머집은 한 번 읽고 나면 레퍼토리를 꿰차게 돼 금방 질려버리는데 이 책이 갖고 있는 웃음은 워낙 깊이가 있어서 벌써 다섯 번째 읽고 있지만 매번 처음 읽는 것처럼 웃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앞으로 여섯 번째, 일곱 번째도 마찬가지로 또 웃을 것 같다. 누구든 웃음을 원하는 순간이 오면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1951년에 세상에 나왔다. 이후 지금까지 꾸준한 관심과 인기를 얻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요즘도 서점에서 항상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이 이렇게 꾸준하게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건 진정성에 바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주인공 홀든처럼 작가 샐린저 또한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다가 한 학교에서도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현실 적응력이 부족했던 작가 자신의 사춘기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썼기에 진정성이 있어서 이 책이 시간의 벽을 넘어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것 같다.

미국인 작가 샐린저가 지은 <호밀밭의 파수꾼>은 청소년이 주인공이라서 청소년 소설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주인공 홀든과 동일한 감성을 지닌 청소년이 읽게 되면 공감대가 크겠지만 어른이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홀든은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세계를 풍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와 어른들에 대한 비판서라고 봐도 된다. 딱딱한 비판서가 아니라 비웃음과 조롱이 뒤섞인 해학과 풍자의 극치를 보여주는 책이다.


<호밀밭의 파수군>의 얼개는, 홀든이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3일간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겪은 사건이나 만나는 사람들에 관한 얘기다. 여러 군상들과의 만남을 통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현실을 풍자하였는데, 이 책의 묘미는 그야말로 해학이다. 주인공이 만나는 인물은 누구 하나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인물이 없다. 이런 시각이야말로 홀든의 어른 세계에 대한 평가다. 홀든은 지독한 풍자가다. 모든 사람이 이 녀석의 의식을 관통하게 되면 어릿광대가 돼버린다.

"다음날 아침에는 예배당에서 그치가 연설을 했어. 그게 자그마치 열 시간 정도나 계속 됐다구. 처음엔 시시껄렁하고 촌스러운 농담을 쉰 가지쯤 늘어놓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야. 지독한 놈이었다구. 그리고 다음에는 자기가 뭔가 곤란한 일에라도 부딪히게 되면,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따위의 얘길 꺼냈어. (중략) 여기엔 두 손 번쩍 들었어. 저 엉뚱한 사기꾼이 말이야, 자동차의 기어를 1단으로 넣으면서, 부디 더 많은 시체를 보내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하고 예수에게 매달리는 꼬락서니가 눈에 선했다구."(36p)


위 서술은, 홀든이 다닌 펜시 고등학교에 기숙사 건물을 기부한 오센버거에 대한 풍자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면 학교를 위해 봉사하는 훌륭한 동창회장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홀든의 문법으로 묘사되면 사기꾼처럼 남의 등 쳐서 돈 벌어서 잘난 척하기 위해서 학교 돈 내는 위선적인 인간이 돼버린다. 이처럼 홀든은 모든 사람을 삐딱하게 바라봤다.

이런 식으로 어른을 평가하는 홀든 또한 어른이 봤을 때 훌륭한 젊은이는 아니다. 문제아다. 홀든에게서 어른들은 위선자고 어릿광대고, 어른이 바라본 홀든은 문제가 많은, 장래가 걱정되는 그런 청소년인 것이다.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관계기에, 결코 어른들의 세계에 동화될 수 없기에, 어쩌면 홀든은 더욱 명징하게 어른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관찰자인지도 모른다.

홀든은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미 여기서부터 홀든의 특징을 간파할 수 있다. 오죽 공부를 못했으면, 얼마나 말썽을 부렸으면 퇴학이란 걸 당할까, 하는 마음이 일게 하는 문제아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에 오기 전에도 벌써 몇 번인가 퇴학을 당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의 어린 동생은 그런 오빠가 걱정돼 "오빠 말해봐, 오빠가 되고 싶은 걸"하고 진지하게 물어볼 정도로 10살짜리 아이 눈에도 한심하고 장래가 걱정될 정도의 대책이 안 서는 애다.

이게 홀든의 전부일까? 그렇지 않다. 홀든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어른들의 세계를 혐오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홀든이 바란 본 어른들의 세계는, 동생이 다니는 학교 벽에 누군가 써놓은 낙서처럼 더러운 것이다. 위선적인 어른들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는 게 어른의 눈에는 문제아로 비치는 것이다.

홀든을 문제아라고 치부하는 어른에게도 방황과 혼란을 느꼈던 청소년 시절이 있었고, 위선적이고 거짓으로 가득하다고 비판하는 어른들의 세계로 언젠가 홀든도 진입하게 된다. 당신의 과거가 나의 현재고, 당신의 현재가 나의 미래인 것처럼 청소년과 어른 사이에는 통할 수밖에 없는 '흐름'이 있다.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런 소통이 있기에 어른인 내가 읽어도 재미와 웃음과 되살아나는 감성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민음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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