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파이가 아니었습니다...
섭섭했지만 한국정부 원망 안해"

[로버트 김 귀국 현장] '스파이 혐의' 10년 만에 백동일 대령과 조우

등록 2005.11.06 19:33수정 2005.11.07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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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6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로버트 김(64ㆍ김채곤)과 백동일 예비역 대령이 서로를 꼭 껴안고 있다.

6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로버트 김(64ㆍ김채곤)과 백동일 예비역 대령이 서로를 꼭 껴안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a 6일 오후 부인 장명희씨와 함께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로버트 김(64ㆍ김채곤)이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귀국 소감을 밝히고 있다.

6일 오후 부인 장명희씨와 함께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로버트 김(64ㆍ김채곤)이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귀국 소감을 밝히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저는 자유의 몸이 된 이 순간 미국이나 한국 정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9년 간의 수감 생활과 보호관찰을 마치고 10년만에 귀국한 로버트 김(65·한국명 김채곤)의 첫 소감은 "원망하거나 섭섭한 마음을 다 잊었다"는 말이었다. 6일 오후 5시 10분 워싱턴발 KE904편을 타고 인천국제공항에 내린 그는 밝은 모습으로 마중 나온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날 인천국제공항에는 '로버트 김 후원회' 회원들과 취재진 등 수십 명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짙은 고동색 코트를 입고 아내 장명희씨와 출국게이트를 빠져 나온 로버트 김은 마중 나온 동생 김형곤씨, 김성곤(열린우리당) 의원과 반갑게 포옹했다. 이어 로버트 김과 함께 스파이 혐의를 받고 강제출국 조치된 백동일(워싱턴대사관 해군무관) 전 대령과 손을 맞잡았다. 후원회원들은 로버트 김이 모습을 드러내자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a 6일 오후 부인 장명희씨와 함께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로버트 김(64ㆍ김채곤)이 환영객과 기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6일 오후 부인 장명희씨와 함께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로버트 김(64ㆍ김채곤)이 환영객과 기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나는 스파이가 아니었다"

로버트 김은 "10년 만에 고국에 들어오니 감개무량하다"며 "익산에 계신 부모님 묘소를 먼저 찾아 뵙고 인사드리고 싶다"는 소감을 밝혔다. 귀국 기념 기자회견장으로 자리를 옮긴 로버트 김은 따로 준비한 '감사말씀'이라는 회견문을 통해 "초기 구명위원회에서부터 최근의 후원회 그리고 후견인 동아리까지 저와 저의 가족들을 지켜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로버트 김은 이 회견문에서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스파이가 아니었고 한국 정부가 고용한 사람도 아니었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는 "(스파이 혐의는) 백동일 대령과의 친분관계에서 출발하여 때로는 자발적으로 그러나 아무 대가없이 그가 필요로 할 정보를 우송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또 "분명한 것은 미국의 안보를 해칠 의사는 처음부터 없었으며 제가 건네준 정보의 내용도 미국의 국방관련 안보사항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로버트 김은 "결과적으로는 미국 정부의 규정을 어기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린 것에 대해서는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백동일 대령과의 '사건'은 우리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고 한반도의 분단 때문에 생긴 부산물"이라며 "이 사건은 한국적 민족주의와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준 미국의 세계주의 사이의 충돌에서 일어난 사고라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로버트 김은 또 앞으로 남은 인생을 청소년 교육활동에 바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로버트 김은 "저는 향후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에게 비젼을 제시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고 한다"며 "조국 대한민국을 세계일등국가로 만들고 나아가 청소년들을 세계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일꾼으로 성장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로버트 김은 기자회견문과 인사말을 통해 "한국 정부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귀국장에서 섭섭한 마음이 아직 모두 가시지 않았음을 언뜻 내비치기도 했다.

a 6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로버트 김(64ㆍ김채곤)과 부인 장명희씨가 환영객들을 보며 활짝 웃고 있다.

6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로버트 김(64ㆍ김채곤)과 부인 장명희씨가 환영객들을 보며 활짝 웃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국 정부가 조금만 인정해줬다면..."

그는 "한국 정부를 정말로 원망하지 않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내가 체포됐을 때 우리나라가 (나로부터 정보를 얻은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인정해 줬다면 조금은 덜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로버트 김은 또 "이번 사건은 저 혼자만의 사건도 아니었고, 한국정부에서 파견나온 무관(백동일 대령)과도 관련이 있었는데 한국정부가 외면한 것은 백 대령의 업무 자체를 무시하는 일이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는 기자들과의 응답을 통해 지난 1994년이 한반도 통일의 기회였다는 견해를 밝혔다. 로버트 김은 "지난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난 뒤 이른바 추도기간이라고 해서 북한의 지도자가 공백이었다"며 "내가 관찰한 소견으로는 당시 남쪽(한국정부)이 조금이라도 한반도와 민족통일을 하려고 했다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런 상황을 모르고 '탈북문제'만 바라보는게 안타까웠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통일에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을까 해서 백 대령에게 적극적으로 컨택(연결)했다"고 밝혔다.

로버트 김과 함께 입국한 부인 장명희씨는 "원래 일을 하지 않았는데 남편이 그렇게(수감)되고 난 후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었다"며 그 동안의 고생을 털어놓기도 했다. 장씨는 "먹고 사는게 가장 힘들었는데 후원회원들이 도와줘서 지금까지 온 것 같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스파이 혐의'를 받은 또 한 사람인 백 전 대령은 "내가 무슨 악연으로 선생님(로버트 김)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건지 고민을 많이 했다"며 "하지만 건강하게 뵙게 돼서 기쁘기 그지없고 대단히 감사하다"고 말했다.

오후 5시40분경부터 인천국제공항 1층 귀빈실에서 기자들을 만난 로버트 김은 오후 6시 20분께 공식 기자회견을 마치고 공항을 떠났다. 이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밝은 모습을 보였지만, 긴 여행의 피로가 겹친 듯 수건으로 자주 땀을 닦거나 물을 찾았다.

한편 로버트 김은 내일(7일) 전북 익산에 있는 부모님 묘소를 찾아 참배할 예정이며, 8일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을 방문, 구명활동 등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할 것으로 알려졌다.

a 6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로버트 김(64ㆍ김채곤)과 부인 장명희씨가 취재진을 향해 꽃다발을 들고 있는 가운데 백동일 예비역 대령이 눈물을 닦고 있다.

6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로버트 김(64ㆍ김채곤)과 부인 장명희씨가 취재진을 향해 꽃다발을 들고 있는 가운데 백동일 예비역 대령이 눈물을 닦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다음은 로버트 김의 '감사말씀' 전문.

친애하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저는 대한민국 정부에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9년 동안의 억류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모국인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을 떠난 지 거의 40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문한지 어언 10년 만입니다.

1996년 제가 미국에서 일할 때 여기 함께 계시는 당시 해군무관 백동일 대령에게 미국의 기밀을 건네주었다는 혐의로 FBI에 체포되었습니다. 그 이후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의 여러 과정은 이미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다시 되풀이하지는 않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스파이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한국 정부가 고용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백동일 대령과의 친분관계에서 출발하여 때로는 그의 요청에 의하여 때로는 자발적으로 그러나 아무 대가없이 그가 필요로 할 정보를 우송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미굯의 안보를 해칠 의사는 처음부터 없었으며 제가 건네준 정보의 내용도 미국의 국방관련이나 안보사항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국정부의 규정을 어기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린 것에 대해서는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저는 자유의 몸이 된 이 순간 미국이나 한국 정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사건의 초기에는 저에게 너무 과한 형량을 부과한 미국이나 저의 구명에 소극적인 한국 정부에 대해 매우 섭섭한 마음을 가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누구를 원망하거나 섭섭한 마음은 다 잊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따뜻한 사랑을 느꼈으며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와 백동일 대령과의 '사건'은 우리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저의 사건은 이 한반도의 분단 때문에 생긴 부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항상 내 마음속에 있는 한국적 민족주의와 생활의 터전을 마련 해준 미국의 세계주의 사이의 충돌에서 일어난 '사고'라는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세계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혈통적, 배타적 민족주의를 극복하여 진정한 세계주의와 조화를 가져야 하고, 반면 미국같은 세계국가는 물리적 힘보다는 보편적 영성으로 각 민족의 다양성을 포용해가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하여 저는 향후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에게 비젼을 제시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조국 대한민국을 세계일등국가로 만들고 나아가 그들을 세계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일꾼으로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국민 여러분.

지난 9년의 세월동안 국민 여러분의 성원과 격려가 없었다면 아마 오늘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여러분 앞에 서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학생의 돼지저금통에서부터 칠순 할머니의 후원금까지 그리고 감옥소에서 받은 수많은 위문 편지들과 저의 힘든 모습을 잘 보도해 준 한국의 언론들이 저를 지켜준 버팀목이었습니다.

특히 초기 구명위원회에서의 최근의 후원회, 그리고 후견인 동아리까지 저와 저의 가족들을 지켜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분명한 것은 저의 지난 10년간의 삶은 여러분께서 도와주심으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여러분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베풀면서 살고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될지는 이번 한국방문 동안 주위의 여러분들과 상의하려 합니다.

끝으로 갖은 고통에서 저를 원망하지 않고 격려해 준 아내와 가족들 그리고 아들의 석방을 학수고대하다가 망자석이 되어 가신 부모님께 사죄드리고 다시 그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여러분의 사랑과 격려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005. 11. 6. 로버트 김 채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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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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