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어떤 것이 부처님의 사리입니까?"

<산사에서 부친 편지>를 읽고

등록 2005.11.10 17:32수정 2005.11.11 10:54
0
원고료로 응원
<산사에서 부친 편지>
<산사에서 부친 편지>노마드북스
편지가 귀한 것 같다. 손으로 또박또박 눌러 쓴 편지는 더 귀한 것 같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컴퓨터로 메일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편지를 받아 봐도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인쇄한 것들이 너무 많다. 손때 묻은 편지가 아니니 그것들은 그냥 한 번 휭하니 읽게 된다. 게다가 중요한 공문서가 아닌 것들은 대부분 쓰레기통에 넣게 된다.

옛날에는 하얀 종이에 먹을 갈아 붓으로 편지를 썼다. 좀 더 시대가 달라졌을 땐 펜으로 글자 하나 하나를 눌러썼다. 마음이 손을 잡아끌고 손이 붓과 펜을 잡아끄니 온통 정성이 깃들 수밖에 없었다. 글자가 맞지 않거나 마음대로 써지지 않았을 땐 몇 번이고 종이를 바꿔서 썼다.


그 정성스런 모습들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더했다. 혼인할 생각에 젖어 있는 도령과 아씨 사이에도 그랬다. 과거 시험을 위해 집을 떠나 공부하던 아들과 그를 위해 기도하던 어머니 사이에 주고 받은 편지도 다르지 않았다.

그럼 산사(山寺)에서 써 보낸 편지들은 어떠했을까? 스님과 스님 사이에, 스님과 거사 사이에, 스님과 보살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들은 좀 더 색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보통 사람들이야 이루어야 할 꿈을 다지며 썼다지만 절에서는 그런 소유욕과는 거리가 먼 편지들이 오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산사에서 부친 편지>(명정 스님 옮김·정성욱 엮음·노마드북스)는 그런 것들을 좀더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 거기에는 절에서 수행하던 스님들이 틈틈이 썼던 편지들을 모은 것들로 무려 130여 편의 편지가 담겨 있다.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성철 스님과 한용운 스님을 비롯하여 경봉·청담 스님들, 그리고 거사와 보살들까지 쓴 서신들이 담뿍담뿍 들어 있다.

"신 새벽 감로수에 먹을 갈아 한 소식 한 소식 툭툭 던지듯이 오가는 문답이며 절집 살림살이, 대웅전 뒤 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 긴 밤 시름을 쏟아내는 풍경소리를 버무려 닦은 큰 스님들의 서간문이 마음속에 그대로의 향연이 되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 머리말


이 편지글 하나 하나를 들여다보면 스님들의 시상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속세를 떠나 구름과 시냇물을 벗 삼아 살아가는 스님들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밝은 달과 맑은 바람뿐이니 시가 자연스레 떠오를 것이다. 뜨락에 핀 모란꽃 향기가 온 산골에 진동하고 맑은 바람 한 가닥이 온 산봉우리에 불어 오니 스님들 마음은 자연스레 시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시가 시 자체로만 끝난다면 뜻을 새길 수는 없는 법, 시 속에 담겨 있는 뜻과 삶을 새길 때에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분들이 쓴 글 속에는 여태껏 살아 온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기에 참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여, 이 책 속에 담겨 있는 편지글들은 세 가지 면에서 큰 깨우침을 주고 있다. 하나는 항일투쟁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르는 스님들에게 격려가 되는 글을 써서 힘을 북돋아 주고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흙과 모래 속에 든 떡을 두고 다투기보다는 흙탕물에 튀지 않는 연꽃처럼 참 부처가 되려고 애를 쓸 때만이 진정한 승려로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것, 마지막 하나는 참 부처가 되는 길은 경전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고행과 수행을 통해서만 깨우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서대문 감옥소에서 보낸 3년간의 세월이 한용운 스님의 열반을 앞당겼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감옥보다도 더 한용운 스님의 열반을 앞당긴 것은 나라를 잃은 슬픔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178쪽)

"지금 종단은 승령정화문제로 어지러우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대개 불은 어느 불이라도 뜨거운 것이라 합하면 한 덩어리가 되고 물 또한 어느 물이라도 젖는 성질이라 합하면 한 덩어리가 되는데 단 세 사람의 마음조차 통일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소." (132쪽)

"이조 500년 불교사상의 최고 지위에 있는 서산대사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일생동안 일자무식한 사람으로 지낼지언정 경전을 파는 학승은 되지 않겠다'."(163쪽)


이는 스님들뿐만 아니라 목사도 신부도 다른 모든 종교의 사제들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또한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면 그 모든 곳 속에 해당되는 말일 듯싶다. 종교인이든 정치인이든 앞에 선 사람이 나라가 바른 길을 걷도록 애를 쓰지 않는다면 누구도 함께 걷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의 물을 정화 시키지 않으면 그 누구도 맛보려고 다가오지 않을 것이며, 말만 번지르르한 채 삶이 엉망이라면 그 누구도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뉴스를 들으니 석가모니의 손가락뼈 사리를 모시고 오는 일로 온통 떠들썩한 것 같다. 헌데 석가모니는 자신의 다비식을 앞두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을 것을 부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자신의 인생이 '공수래 공수거'였다는 삶을 실천적으로 보여 주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석가모니를 뒤따르던 제자들, 불자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또 다른 불탑(Golden Pagoda)을 쌓고자 하지는 않았는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런 뜻에서 춘성 스님이 경봉 스님에게 써 보냈던 선문답 서신과 경봉 스님의 답신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글이 아닐 수 없다.

"스님, 어떤 것이 부처님의 사리입니까?"
"서울에는 지금 곡식이 귀하다오." (276쪽)


이는 부처의 사리에만 매달린 채 일반 백성들의 안위는 까마득히 잊고 지내는 오늘의 사판승(事判僧) 스님들, 오늘의 모든 종교 사제들, 그리고 오늘의 모든 정치인들을 향해 띄웠던 서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뜻에서 이 글은 후대에까지 두고두고 새겨야 될 편지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산사에서 부친 편지

경봉 스님 외 지음, 정성욱 엮음, 명정 옮김,
노마드북스, 2005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3. 3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4. 4 블랙리스트에 사상검증까지... 작가 한강에 가해진 정치적 탄압 블랙리스트에 사상검증까지... 작가 한강에 가해진 정치적 탄압
  5. 5 [이충재 칼럼] 농락당한 대통령 부부 [이충재 칼럼] 농락당한 대통령 부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