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봉 스님, '무심하라!'는 화두를 던지다

[서평]큰 스님들의 주옥 같은 글 <산사에서 부친 편지>

등록 2005.10.14 12:28수정 2005.10.15 12:44
0
원고료로 응원
'산사에서 부친 편지' 책 표지
'산사에서 부친 편지' 책 표지노마드북스
"가을바람이 펼쳐져 있는 책갈피를 넘깁니다.
문 밖에 낙엽 지는 소리가 사락사락 귓가를 간지럽힙니다.
만행 끝에 잠시 머문 이 해인사 문지방에는
가을이 때늦은 봇짐을 풀어놓고 나를 유혹하는 듯합니다.
붓을 꺼내 그 가을의 향기를 그리려 하나
흰 종이에 그린 것은 오로지 점 하나 뿐입니다."


고봉 스님이 경봉 스님에게 보낸 이 아름다운 문장의 편지에 나는 정신이 아득하다. 스님들께 이런 향기가 있었다니 참으로 놀랄 일이다. 나는 그저 스님들에게 선문답만 있는 줄 알았는데 사람 냄새가 있었고, 세상의 향기가 있었다. 큰스님들에겐 속세의 인연은 없는 줄 알았지만 역시 그 끈은 질기고 질겼다.


"글 가운데 어머니의 몸이 점점 좋지 않다는 말을 들으니 / 마음 아프기 그지없네. / 중놈에게 어머니란 있을 수 없음에도 / 속세란 더욱 아니 그러할진대 / 자네의 미어지는 가슴이 / 어찌 사람으로서 안타깝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략) 부디 이번 어머니에 대한 / 마지막 병간호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게"

이 글은 병든 어머니에 대한 간호를 용서해 달라는 벽안 스님의 편지에 경봉 스님의 답장 중 일부이다. 경봉 스님은 속세의 인연을 칼 같이 내치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무량승불이다 네 몸을 사랑하라"
"그렇다. 우리 모두는 무량승불이다 네 몸을 사랑하라"이진수
그런가 하면 경봉 스님은 정시우 거사에게 "네 놈 눈빛은 중이 될 눈빛이 아니다! / 못된 놈, 썩은 몸뚱이 어디 함부로 중이 되려 하느냐. / 속세의 연을 끊지 못하는 자는 결코 중이 될 수 없느니라. / 네 놈의 눈빛에는 연(緣)이 가득해. / 설사 출가를 하더라도 도망칠 놈이니 어서 돌아가거라!"라고 호통 치기도 한다.

스님들에게도 만남은 중요한 모양이다. 송광사의 춘광 스님이 경봉 스님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전부터 사모해도 만나 뵙지 못하여 / 구름 쳐다보고 달을 읊으며 혼자 서성거렸소. / 잔 속엔 한가로이 뜰에 잣나무 그림자 비치고 / 젓대 속엔 봄 매화 피는데. / 천기는 항상 추위와 더위가 오가고 / 사람들은 세월이 가는 것을 탄식하오. / 오랜 세월 서로 생각하나 만나기 어려우니 / 원컨대 이 눈 먼 거북이 나무, / 만남을 베푸소서."


그리움이 사무치는 것을 아름다운 필치로 간절히 읍소한다. 그러면서 '눈 먼 거북이 나무 만남을 베푸소서'라고 청을 놓는다. 그러자 경봉 스님은 춘광 스님에게 답을 쓴다.

"맑은 시 한 폭이 봄 푸름과 같아
창 앞에 둔 매화 어젯밤 피었네.
세상이 흉년을 만나 촉도처럼 어려우니
순 임금 요 임금 같은 세월에
다시 만남을 기약하세."



만해 한용운 스님의 육필 원고
만해 한용운 스님의 육필 원고노마드북스
스님들에게도 한 폭의 그림 같은 우정이 샘솟는 모양이다. 스님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란 얘기이지 않을까? 또 스님들도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구허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설봉 스님이 경봉 스님에게 보낸 편지는 슬픔 그 자체이다. 그 슬픔 뒤에 설봉 스님은 이슬처럼 살겠다고 말한다.

"한 세상 사는 일이 그저 꿈길인가 생각하니, / 남은 생이 부질없고 살아온 길에 또 하나의 죄를 업는 듯 해 / 그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산다는 것이 곧 죄이며 그 죄의 용서를 위해 산다’는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렇듯 모든 것이 아침 이슬이니 / 남은 목숨 이슬처럼 살아야겠습니다."

"지혜란 깨쳐야 하는 것이지 깨치기 전에는 결코 모르는 것"
"지혜란 깨쳐야 하는 것이지 깨치기 전에는 결코 모르는 것"이진수
또 책을 몇 쪽 또 넘기면 경봉 스님이 김정헌 거사에게 '무심하라'라는 화두를 던진다.

"인생이란 / 밤늦은 시간, 촛불을 앞에 두고 / 한 잔 차를 끓여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 어쩌면 부질없는 것이 인생이며 / 한 번쯤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 또한 인생입니다. / 아이가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고 젖을 빠는 순간부터 / 세상의 인연이 시작되듯 / 삶은 어쩌면 자신과는 연연하지 않게 / 오고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사람이란 티끌이며 허공입니다.(중략)

그러니 때로는 모든 세상사에 한 번쯤 무심해져 보는 것도 몸에 좋을 것입니다. / 무심이란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 자신과의 단절을 뜻하는 것입니다. / 무심의 강은 자신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 욕망과 사악을 버리는 강이기 때문입니다. / 아아, 무심하라."


이는 김정헌 거사가 경봉 스님에게 인연이 무엇인지 묻는 편지에 대한 답이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싶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한 번쯤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닌지요"라는 물음이었다.

그런가 하면 경봉 스님은 화산 스님에게 '도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의 편지를 보낸다.

"무엇이 너의 송장을 끌고 여기까지 오게 했는가"
"무엇이 너의 송장을 끌고 여기까지 오게 했는가"이진수
"도란 무엇인가? / 손님이 찾아오면 맛있는 차를 대접하고 / 모기는 모닥불로 쫓는 것입니다. / 도란 높은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일. / 그것이 바로 법도인 것입니다. / 애써 도를 알려고도 하지 말고 / 애써 모르는 척도 하지 마십시오.

보검으로 죽은 송장을 베지 않는 법. / 보검은 항상 자신의 마음속에서 반짝이는 것. / 어떤 이가 자신을 찾아오면 / 스스로 그 보검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 그 어떤 이도 보검을 가지고 있으므로 / 스스로 겸손한 것 또한 보검이기 때문입니다."


스님의 편지 한 장은 설법 그 자체이다. 이 한 장의 편지에 감동을 받지 않을 자 그 뉘가 있을까? 스님의 이 편지를 읽으면서 나도 도를 깨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굳이 산속의 절에 큰 스님을 찾아 뵐 까닭이 무에 있을까?

이런 내용들은 근대 선지식의 선구자인 경봉 스님을 모시고 수행을 쌓았던 양산 통도사 극락선원의 선원장인 명정 스님이 큰스님들의 편지를 옮기고, 시인 정성욱씨가 엮은 <산사에서 부친 편지>(노마드북스)에 나오는 글들이다.

이 책은 한문으로 된 편지를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쉽게 옮기려고 노력했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어려움을 남아 있다. 일부 불교 용어는 우리말로 풀어주었다 해도 풀어주지 못한 한자말들은 아직 내겐 난해할 뿐이다. 역시 불교 화두는 화두인 모양이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청담 스님이 경봉 스님에게 보낸 <마음꽃> 연하장
조계종 종정을 지낸 청담 스님이 경봉 스님에게 보낸 <마음꽃> 연하장노마드북스
위-장지연(독립운동가) 거사가 경봉 스님에게 보낸 편지 원본, 아래-경봉 스님이 고봉스님에게 보낸 편지 원본
위-장지연(독립운동가) 거사가 경봉 스님에게 보낸 편지 원본, 아래-경봉 스님이 고봉스님에게 보낸 편지 원본노마드북스
"번뇌는 곧 생각이며, 마음입니다.가진 것이 분명 있는데 없는 것 같고 얻은 것이 있는데 잃은 것 같은 마음 그것이 바로 인간을 사악하게 만드는 근원입니다"
"번뇌는 곧 생각이며, 마음입니다.가진 것이 분명 있는데 없는 것 같고 얻은 것이 있는데 잃은 것 같은 마음 그것이 바로 인간을 사악하게 만드는 근원입니다"이진수
하지만 이 정도로라도 아름다운 우리말로 옮겨 놓은 명정 스님과 정성욱 시인의 정성이야말로 어느 누가 탓할 수 있으랴. 뿐만 아니라 몇 장 건너 한 장씩 사진으로 옮겨 놓은 전주 동암고교 이진수 교사가 찍은 산사의 아름다움은 가히 어느 사진집에도 뒤떨어지지 않음이다.

나는 보통 책을 읽을 때 속도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정성 들여 읽기도 하겠지만 며칠에서 일 주일을 기다려야 독서는 끝이 난다. 그런데 이 책은 약간의 어려움이 있음에도 단숨에 읽어 버렸다. 그건 우리에게 주옥 같은 가르침을 설법이란 느낌을 주지 않은 채 한 편의 시집을 읽는 감흥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들이여! 우리는 아름다운 이 가을 <산사에서 부친 편지>를 읽으면서 가을 바람이 펼쳐져 있는 책갈피를 넘기는 느낌을 향유했으면 한다. 동시에 어렵지 않은 '무심'을 이해하고, '도'를 깨쳐 보기를 기대한다. 나는 오늘 산사에서 부친 편지로 '깨달음'에 다가가 본다.

산사에서 부친 편지

경봉 스님 외 지음, 정성욱 엮음, 명정 옮김,
노마드북스, 2005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3. 3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4. 4 블랙리스트에 사상검증까지... 작가 한강에 가해진 정치적 탄압 블랙리스트에 사상검증까지... 작가 한강에 가해진 정치적 탄압
  5. 5 [이충재 칼럼] 농락당한 대통령 부부 [이충재 칼럼] 농락당한 대통령 부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