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 대신 '갈등'만 키운 노대통령 글

[김종배의 뉴스가이드] 대통령은 말하지 말라는 법 없지만...

등록 2005.11.28 10:21수정 2005.11.28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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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라고 입 닫고 살라는 법은 없다. 대통령도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구가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표현을 엄격히 관리하고 파장을 면밀히 고려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 대통령은 국민의 한 사람임과 동시에 국가를 대표하는 원수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어제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줄기세포 관련 언론보도에 대한 여론을 보며'란 글은 부적절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글에서 '관용'을 강조했다.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획일주의가 압도할 때 인간은 언제나 부끄러운 역사를 남겼다"며 "서로 다른 생각이 용납되고 견제와 균형을 이룰 때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했다.

뭘 말하고자 한 것인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노 대통령은 내년 초에 자신의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 논란이 큰 국가전략과제에 대한 사회적 의견수렴절차에 대한 구상을 밝힐 것이란 청와대의 설명도 뒤따랐다. 노 대통령은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지역대결구도 해소와 국민 통합을 강조한 바도 있다.

노 대통령이 사회갈등 해소에 골몰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다. 국민대통합 연석회의 구성을 제안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갈등 해소와 국민 통합에 골몰해 있는 노 대통령에게 < MBC > 'PD수첩' 보도를 둘러싼 극심한 갈등은 본인 표현 그대로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뭘 말하고자 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글은 관용이 아니라 갈등을 더 키우는 결과를 가져올 게 뻔하다. 노 대통령의 글이 공개된 후 인터넷 등에서 찬반 양론이 제기되는 현상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노 대통령은 < MBC >의 기사가 "짜증스럽다"고 했다. 노 대통령 나름대로 < MBC > 기사에 대해 평가를 내린 셈이다.

생명윤리심의위 최종 입장 나오지 않았는데 벌써 단정


노 대통령의 글이 부적절하다고 지적하는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은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 MBC > 기사의 잘잘못을 공개적으로 따질 계제가 아니다.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 윤리문제에 대한 정부의 최종 입장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내일 대통령 자문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열려야 최종 입장이 나온다. 자문을 해주는 사람은 아직 입도 열지 않았는데 자문 받는 사람이 벌써 단정을 해버린다면 자문이 필요할 이유가 없다.

형식논리에 빠져 절차만 따지는 게 아니다. 노 대통령의 글이 국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심각히 고려해야 한다.

황우석 교수팀 연구윤리 문제가 불거지자 외국의 한 언론은 한국 정부의 부실한 연구 관리를 지적한 바 있다. 이런 상태에서 대통령이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가생명윤리심의위의 토의를 거치지도 않은 사안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결과적으로 국가생명윤리심의위가 그런 입장을 추인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면 국제 사회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더 나아가 노 대통령은 새로운 사실을 전했다. < MBC >의 "처음 취재방향은 연구 자체가 허위라는 것이었다"고 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나돈 소문이긴 하지만 < MBC > 'PD수첩'팀에서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은 사안을 대통령이 나서 공식화해 버린 것이다.

물론 노 대통령은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며 선을 그었지만 이 '선긋기'가 국제 사회에서도 통할지는 미지수다. 국제사회는 고사하고 당장 국내의 <중앙일보>는 'PD수첩'이 황 교수팀의 "연구 자체"를 강압적인 방식을 동원해 취재했다고 보도했다.

이로써 황 교수팀 연구윤리 논란은 새 의제를 떠안아야 되는 부담을 안게 됐다.

그 뿐만이 아니다. 노 대통령은 "취재의 계기나 방법에 관하여도 이런 저런 의심을 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관련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취재의 동기와 방법에 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는데 "물론 호의적인 얘기는 아니었다"고 했다. <중앙일보>는 노 대통령의 이 말과 관련해 'PD수첩'팀의 '강압적인 취재' 사례를 자세히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일방적인 의혹 제기다. 강압 취재 여부에 대한 판단은 양자의 시각차가 극복되지 못하면 법정에서 가리면 되는 일이다. 백번 양보해 <중앙일보>와 같은 언론이 의혹 제기 차원에서 보도할 수는 있겠지만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의혹을 제기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대통령의 의구심 표시, 논란의 당사자인 청와대 비서관 보고에만 근거

노 대통령이 제기한 문제는 "취재의 계기(동기)나 방법"이다. 그것이 "취재"에 대한 문제제기인 만큼 언론 현상에 한정해 말하면 명예훼손 소송에서 다투는 '위법성 조각사유'에 해당하는 문제들이다. 그렇다면 이 판단 주체는 법원이다.

사안의 성격은 이렇다. 그런데도 다툼의 당사자도 아닌 대통령이 황우석 논문의 공저자인 청와대 보좌관의 보고에만 근거해 공식적인 글에서 의구심을 표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지는 따져볼 일이다.

노 대통령의 글이 부적절하다고 보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PD수첩' 보도를 둘러싼 논쟁이 변질될 여지를 남겼다는 점이다.

노 대통령은 'PD수첩' 12개 광고주 가운데 11개 광고주가 광고계약을 취소한 사실을 언급한 뒤에 "이것은 이미 도를 넘은 것"이라고 규정했다. "저항을 용서하지 않는 사회적 공포…는 이후에도 많은 기자들로 하여금 취재와 보도에 주눅 들게 하는 금기로 작용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만 읽으면 별 탈이 없겠으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당장 <조선일보>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조선일보>는 고위 공직자의 인터뷰·기고·협찬 금지를 핵심으로 하는 참여정부의 "악의적 왜곡보도를 일삼는" 언론대응법을 환기시킨 뒤 "특정 언론을 두둔하면서 '관용'을 촉구하는…경우에는 '관용'보다는 '역성'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비난했다.

이로써 국익과 진실을 화두로 한 'PD수첩' 보도 논란은 그 누구도 원치 않았던 정치 논란으로 변질될 계기를 맞게 되었다. 최소한 'PD수첩' 보도 해결과정에서 정치적 해석과 공격의 여지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조선일보>가 "('PD수첩'에 광고를 중단키로 했던 기업들이) 조만간 대통령의 '관용 촉구'에 '감동'하거나 '반성'해서…광고를 재개할 수도 있다"고 빗장을 걸어버린 건 우려할 만한 이후 사태의 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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