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 익은 김치처럼 맛있는 삶의 내음이 배어있는 어머니노태영
지난해부터 우리 가족은 시골에서 모두 함께 모여 김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틀 정도 날을 잡아 전북 진안에 있는 부모님 댁에서 김장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부모님은 김장 때문에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십니다. 그렇지만 자식들은 김장을 핑계로 고향에 모일 수 있어 기쁘기만 합니다.
칠남매가 모여서 하는 김장을 생각해 보세요. 그야말로 잔칫집을 방불케 합니다. 신나는 잔치입니다. 김장이 걱정스럽고 힘이 드는 도시의 김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네 며느리와 어머니 그리고 큰 누나가 하는 김장은 한 편의 드라마처럼 아름답습니다. 이제 두 해째 접어들면서 손발도 척척 맞아 힘이 훨씬 덜 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희 네 형제와 매형도 뒤에서 한 몫씩 거듭니다. 아예 고무장갑을 끼고 김치를 버무리는 둘째 형님은 가장 신이 났습니다. 김장 날에 빼놀 수 없는 것이 바로 겉절이와 함께 먹는 막걸리 아닙니까? 막걸리는 큰 매형 담당입니다. 바로 막걸리 회사의 공장장님이시거든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것저것 챙겨 양념 속에 넣으시느라 손발이 쉴 틈이 없습니다. 아들과 조카들도 덩달아 바빠져서 잔디 깔린 마당에서 노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가을엔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는 속담이 정말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막 삶아 낸 돼지 수육 한 점과 김장김치와 함께 먹는 막걸리는 정말 별미입니다. 모두가 한잔씩 하다보면 허리도 삭신도 어디 있는지를 잊어버립니다. 이웃집 아줌마도 아저씨도 막걸리 한잔씩 쭉 걸치고 나면서 술값과 김치값을 내느라 덕담을 하십니다. "이 집 김치처럼 맛있는 김치를 먹어 본적이 없당께." 덩달아 신이 난 나는 "아저씨 막걸리 한잔 더 드세요"하면 아저씨는 "그럴까"하면서 아예 자리를 잡으십니다.
올 김장은 작년보다 더 즐겁고 신나는 잔치였습니다. 작년에는 네 집 식구 김장을 했는데 올해는 여섯 집 식구의 김장을 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양념과 부모님의 사랑과 고통이 김장김치에 들어간 것입니다.
자식들에겐 즐거운 잔치이지만 부모님에겐 너무 힘든 한 해의 행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집 김장도 힘이 드는데 여섯 집의 김장을 준비하시는 아버지 어머니의 맘고생은 그리고 몸 고생은 훨씬 더 크실 것입니다. 그래도 50에 접어든 아들도 80이 다 되신 부모님에겐 아이일 뿐입니다. 부모님 걱정보다는 나만 생각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김장김치를 단지에 각각 담아 서울로 인천으로 전주로 익산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자식들을 보는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아마 아쉬움이고 멀어져가는 자식에 대한 안쓰러움과 뿌듯함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이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삭이지 못한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슬그머니 어머니 주머니와 아버지 손에 놓고 오는 자식의 마음을 부모님의 너그럽고 하해와 같은 이해에 맡겨 둡니다.
기름 값과 전기 값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보일러를 틀지 않으시는 부모님이 안쓰러워 마음이 아픕니다. 언제나 자식 걱정만 하시고 당신들의 몸은 돌보시지 않는 부모님이 멀어져 가는 고향의 느티나무처럼 길게 그림자를 자아냅니다.
이런 김장잔치가 끝난 후 지금 밥상에 올라오는 김치도 정말 다양합니다. 우리 어머니의 전매특허인 '단풍깻잎 김치'가 식탁을 화려하게 만듭니다. 단풍깻잎 김치는 노랗게 물든 깻잎만을 모아 깻잎김치를 담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보기만 해도 고소롬한 들기름 냄새가 입안에서 가득 모아집니다.
단풍깻잎 김치에 들어가는 양념과 각종 재료들을 보면 어머니의 섬세함과 자식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깻잎 한 장 한 장에 들어가는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바로 맛과 향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 딸 서영이과 아들 현진이도 단풍깻잎 김치를 먹을 때마다 할머니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고향의 향기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