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작은 섬', 우리 동네에 공부방 들어온대요!

강남구 강제이주민 거주지에 대학생 공부방 만들어

등록 2005.12.02 15:13수정 2005.12.02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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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이를 가르치는 박찬우 선생님의 표정은 늘 밝다
보람이를 가르치는 박찬우 선생님의 표정은 늘 밝다박수호
다래(가명·ㄱ중 2)는 요즘 수요일이 가장 기다려진다. 과학 선생님이 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다래가 좋아하는 과목이다. 하지만 학교 수업을 듣다 모르는 게 있어도 그냥 넘어가기 일쑤였다. 수업시간에 괜히 튀면 자기 존재가 알려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학교가 파하면 곧장 집으로 와서 인터넷으로 채팅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다래. 엄마는 어릴 때 집을 나갔고 지금은 인근 마트에서 짐을 나르는 아버지와 초등학교 5학년 동생이 유일한 식구다.

위성걸(20·고려대 1학년) 선생님이 처음에 같이 공부하자고 했을 때 다래는 왠지 쑥스럽고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숙제도 내주고 어려운 문제도 척척 해결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일주일 만에 만나는 선생님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숙제 다하기. 낑낑대며 숙제를 하다보면 평소 관심 밖이었던 공부가 점점 재밌어진다며 활짝 웃는다.

이웃집 보람이(가명·ㄷ중 3) 언니도 마찬가지다. 판타지 소설가가 꿈이라서 우선 다양한 언어를 익히고 싶다는 그지만 외고 진학은 엄두도 못 낸다. 강남 노른자 위 땅에 자리잡은 학교인 만큼 반 아이들 중 절반 이상이 외고다, 과학고다 해서 입시학원을 들락거린다지만 그에겐 해당사항이 없다.

이미 진로도 상업고교로 정했다. 공고에 다니는 오빠처럼 조금만 열심히 하면 장학금도 받을 수 있고 대학도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다. 다만 막연하나마 누군가가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좀 가르쳐주고 고등학교 가서도 뒤처지지 않게 도와줬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인지 박찬우(21·고려대 2학년) 선생님은 정말 고맙다. 처음 공부를 가르쳐주겠다는 말에 어떤 과목부터 배워볼까 하며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는 보람이. 박 선생님이 중국에서 살다왔다는 소리에 영어, 수학도 제쳐두고 우선 중국어를 가르쳐달라고 졸라 이제 배운 지 두 달째다. 일단 성조만 달달 외워야 하는 통에 지루할 법도 하지만 보람이의 얼굴은 사뭇 진지하다.

'"내 자식은 이렇게 살면 안 된다'면서도 방도가 없었는데..."


<font color=a77a2>[왼쪽] 희망을 부르는 신발들…. 포이동 마을회관에서 공부방 교사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font color=a77a2>[오른쪽] 이틀 전 내린 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골목길
[왼쪽] 희망을 부르는 신발들…. 포이동 마을회관에서 공부방 교사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오른쪽] 이틀 전 내린 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골목길박수호
다래와 보람이가 사는 곳은 서울시 강남구 포이동 266번지. 멀리 보이는 초고층 아파트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이곳은 강남의 '작은 섬'이라 불리는 대표적인 빈민촌이다. 비가 온 건 이틀 전인데도 길은 여전히 질척거렸다. 나무와 슬레이트로 잇댄 집들이 얼기설기 모여 있는 가운데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좁은 시멘트 골목길은 을씨년스럽게 내장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기온에 마음마저 얼어붙을 즈음 마을 주민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지난 겨울에 다녀갔던 대학생들이 이번 겨울부터 자발적으로 공부방을 열겠다는 것이다. 그간 자식들을 제대로 공부 한번 시켜보지 못한 게 늘 가슴에 한이 되었던 터였다. '포이동 266번지 사수대책 위원장' 조철순씨에게도 이 소식만큼은 흐뭇하다.


"고맙죠. 저희야 그렇다지만, 하고 싶어도 부모가 못 대줘서 못하는 심정 오죽하겠어요? '내 자식은 이렇게 살면 안 된다' 하면서도 손쓸 방도가 없었어요. 이렇게 대학생들이 직접 나서주니 뭐라고 고마워해야 할지…."

포이동 공부방의 산파 역할을 한 김규남(26 서강대 4)씨. 지난 겨울 빈민활동이 계기가 되어 이 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하지만 각 학교 게시판과 화장실마다 교사 모집 벽보를 붙이러 다닐 때만 해도 '과연 이게 될까?' 싶었단다.

기적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한 달만에 40여 명 이상이 교사로 지원해 지금은 더 이상 인원을 받기 힘들 정도다.

지난달 6일 감격적인 '포이동 공부방 준비모임 결성식'을 치러낸 이후 현재 2개월간의 교사교육을 진행 중이다. 가르치는 것도 시급한 문제지만, 우선 지원 교사들이 포이동과 아이들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순서라는 생각에서다. 교육 프로그램도 '포이동 실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아이들이 당당한 인격체로 살아갈 수 있는 방안' 등으로 꾸며졌다.

포이동 공부방은 내년 1월 2일 정식으로 문을 연다. 신청한 아이들도 14명이다. 그전에 보람이나 다래처럼 원하는 이들에게는 우선 개인별로 선생님이 공부를 가르칠 수 있도록 했다.

이제 시작이지만 넘어야할 산도 많다. 우선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재원 마련. 일단 교육 공간은 마을 회관으로 잡았지만 단칸방인 데다 학생들 또한 다양한 학년이라 자칫 산만한 분위기 때문에 진행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보람이와 다래 역시 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선생님이 앉아서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교사들이 5천원의 회비를 내고 있지만 이 정도로는 교사 교육프로그램 진행도 벅차다.

최근 아동복지법이 개정되면서 정부의 공부방 지원대책 역시 발목을 잡고 있다. 정부는 월 지원금을 68만원에서 200만원으로 늘리는 대신 교육목적 건물 25평 이상(20인 이하는 18평)의 시설을 갖추도록 기준을 강화했는데 이 기준에 따른다면 포이동 공부방은 지원대상에서 제외될 소지가 다분한 데다 오히려 단속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정부가 외면한 포이동 266번지에서 공부방을 세우는 만큼 국가 보조는 어불성설"이라는 김규남씨는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라며 "그들에게 보다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할 수 있도록 사회의 관심을 바란다"고 말했다.

현행 법으로 포이동공부방은 오히려 단속대상

전날 인근지역에 강제철거가 시행되자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절박해졌다.
전날 인근지역에 강제철거가 시행되자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절박해졌다.박수호
한편 기자가 찾은 지난달 30일, 마을 회관에 모인 사람들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인근 공공주차장 부지에 살던 사람들이 강제철거 당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만 해도 포이동 266번지에는 강제이주민과 인근 넝마주이들이 주축인 자발적 이주자들이 한데 모여 살았는데 철거지역은 자발적 이주자들이 자리 잡았던 공간이었다.

29일 일제철거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굴삭기와 건장한 용역직원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적잖이 동요했다.

"강제이주민들의 마음에는 불안감과 싸워나가야겠다는 의지가 함께 싹텄다"고 대책위 위원장 조철순씨는 말한다. 서울시가 1990년부터 부과한 가구당 5천만∼7천만원씩 토지변상금 탓에 오도 가도 못한 신세가 대부분인 이들. 행정자치부 지침에도 불구하고 일선 구청은 여전히 서울시 땅을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다고 보고 이들의 주민등록 등재마저 외면하고 있다.

손발이 말라붙는 병(버그시병)에 걸려 3년째 일손을 놓고 있다는 유도관(62)씨는 "가난으로 20년 전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도 중학교 2학년 때 이후 본 적이 없다"며 "이제 노년에 불안감 없이 내 몸 하나 뉘일 따뜻한 집이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차가운 방에서 전기장판에 의지하며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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