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때문에 외롭지 않은 곳

[중앙아시아 여행기 9] 천년의 고도(古都) 부하라 3

등록 2005.12.07 12:04수정 2005.12.0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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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 축제랍시고 간밤 늦게까지 놀았는데도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다. 어제는 구시가지를 구경했으니 오늘은 좀 외곽으로 돌아볼 생각이다. 구시가지 바깥에 놓여진 영묘 두 군데와 쉬토라이 모이하사 궁전을 가볼 계획을 세웠다.

라비하우스에서 지도를 보고 한참을 걸어가니 공원이 나왔다. 놀이시설도 있고 많은 나무와 꽃밭이 있는 곳이다. 이 공원 한쪽으로 이스마일 사마니드 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차쉬마 아윱 묘가 있다.

우선 이스마일 사마니드 묘. 9세기 사만 왕조의 이스마일 사마니가 아버지를 위해 만들었다는 이 사각형 건물은 중앙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한다. 13세기에 칭키즈칸 원정대가 이 곳에 왔을때는 이 묘가 땅속에 묻혀있었기 때문에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현재의 모습은 20세기 초에 구 소련의 고고학자가 발굴한 것이다.

부하라의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이 묘도 황토색이다. 단순한 사각형 건물에 돔을 얹어놓은 구조지만 벽면의 모습이 특이하다. 다른 건물들처럼 장식없이 미끈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4면 모두 다른 문양을 사용해 장식한 건물이다. 그리고 돔의 모습도 그렇다. 황토색 돔에는 뾰족한 삼각뿔이 군데군데 솟아 있어서 손바닥을 갖다 대면 찔릴것만 같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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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일 사마니드 묘 ⓒ 김준희

실제로 이 벽면은 햇볕의 강약과 각도에 따라 눈에 비치는 문양의 모습이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그걸 확인하자면 여기 앉아 묘를 바라보며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 판이다. 포기하고 다른 영묘로 향했다.

오아시스 도시이기는 하지만 관개시설이 잘된 덕에 부하라의 곳곳에는 운하가 있고 스프링쿨러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오래 전에는 물이 없어서 많은 고생을 했고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차쉬마 아윱 묘는 바로 그 전설과 연관이 있다.

'차쉬마 아윱'은 '욥의 샘'이란 뜻이다. 여기서 욥은 바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욥이란 인물. 부하라의 주민들이 물이 없어서 고생을 하고 있을때 욥이 나타나서 지팡이로 땅을 내려치자 그 곳에서 샘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정말 전설같은 이야기다. 지금 차쉬마 아윱의 묘가 만들어진 곳이 바로 그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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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쉬마 아윱 묘 ⓒ 김준희

명색이 천주교 신자지만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욥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별로 알지 못한다. 욥이 살았던 곳이 지금의 팔레스타인이라는 것 정도 밖에는. 팔레스타인에서 부하라까지는 족히 수천 km의 거리다. 욥이 정말 중앙아시아까지 왔던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

욥은 구약성서 뿐 아니라 코란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이 건물이 만들어진 것은 14세기 이후. 그때는 이미 이 지역을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때다. 그렇다면 그 전설의 주인공은 코란의 등장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할것도 같다.

부하라 구경의 마지막은 쉬토라이 모이하사 궁전이었다. 부하라 외곽에 위치한 캬라반 바자르에서 택시를 타고 도착한 이곳은 부하라 왕국의 마지막 칸(왕)이 살았던 여름궁전이다. 19세기 말에서 20 세기 초에 러시아건축가와 현지의 건축가가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동서양의 양식이 혼합된 궁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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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토라이 모이하사 궁전의 정문 ⓒ 김준희

이 곳의 입장료는 3000숨(숨은 우즈벡의 공식화폐단위, 1숨은 한화 약 1원). 유럽풍의 하얀건물을 지나서 안쪽으로 들어가니까 넓은 정원이 있고 연못과 그 앞의 2층 건물이 눈에 보인다. 이 곳 역시 지금은 박물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1층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옷과 침대 등이 있고 라면그릇으로 사용하면 딱일 듯한 그릇들이 보였다. 화려하게 장식한 접시와 주전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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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토라이 모이하사 궁전의 유럽풍 건물 ⓒ 김준희

그리고 많은 카펫이 있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카펫부터 화장실 앞에 놓아두면 좋을 것 같은 작은 카펫까지 다양한 종류의 카펫들이 벽과 바닥에 펼쳐져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구석마다 둥그렇게 말린 채 세워져 있었다.

도대체 이 많은 카펫을 어디에 사용했을까 궁금해질 정도로 많다. 궁전 내부의 벽과 바닥을 모두 덮고도 남을 듯한 카펫. 당시 이 궁전에 몇 명이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들이 하나씩 몸에 두르고 있더라도 남을 만한 분량이다.

2층 한쪽의 테라스로 나가자 그 곳은 카페로 바뀌어있었다. 한 테이블에 앉아서 차이를 마시면서 밖을 보았다. 밖에는 넓은 연못이 보인다. 예전에 이 연못은 칸의 후궁들이 수영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후궁 대신에 팔뚝만한 시커먼 물고기들만이 헤엄쳐 다니고 있다.

여전히 날은 덥고 하늘은 파랗다. 이 테라스는 부하라의 칸이 자주 찾았던 곳이라고 한다. 난 살아생전에 칸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그런 기분으로 이곳에 앉아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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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라의 칸이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2층 건물과 연못 ⓒ 김준희

3일이 지나고 나자 부하라에서는 할 일이 없어졌다. 할 일이 없다기 보다는 부하라가 익숙해진 것이다. 부하라의 웬만한 유적들은 모두 보았고 굼바스와 거리도 많이 걸어보았고 라비하우스 근처의 노천카페에서 꼬치구이와 양고기국도 먹을만큼 먹어보았다. 볼펜과 머니를 외치며 쳐다보는 아이들에게도 익숙해졌으니 이제는 부하라를 떠날 때가 된 것이다.

부하라는 독특한 곳이다. 조용하면서도 시끌벅적한 곳이 부하라다. 라비하우스 주위의 노천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다보면 세상이 뒤집어지더라도 이 곳만큼은 조용함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적한 분위기다. 하지만 여기서 몇 분만 걸어서 굼바스와 카펫 바자르에 이르면 온갖 상인과 호객을 하는 아이들 때문에 소란스럽다.

난 부하라에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언제나 혼자일 수밖에 없었던 타쉬켄트나 사마르칸드와는 달리 부하라에서는 혼자 돌아다녀도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관광객을 그냥 놔두지않는 상인과 아이들 때문일 것이다. 부하라의 어느곳을 걷더라도 붙임성있게 다가오는 많은 아이들을 볼수 있다.

때로는 뭔가 물질적인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난 이 아이들이 좋았다. 부하라에 도착해서 빨리 익숙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나에게 웃음을 보여준 아이들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만일 부하라에 다시 온다면 그건 아마 이 아이들이 보고 싶기 때문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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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하우스의 고목과 노천카페 ⓒ 김준희

다음 목적지는 여기서 서쪽으로 약 500km 떨어진 히바라는 곳이다. 히바는 어떤 분위기일까. 히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익숙한 곳을 떠나서 새로운 곳으로 향할때는 설레임과 함께 불안한 기대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때로는 두려움 까지도.

여행이 주는 묘미중 하나는 그런 불안한 감정들을 극복하고 낯선 환경에 적응해가는 것이다. 낯선 곳에 처음 도착해서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그런 환경을 자신에게 익숙하게 만들어 가는 것. 처음 보는 거리와 처음 보는 사람과 때로는 적대적인 눈빛들이 있는 곳을 친숙하게 바꾸어 가는 것이다.

어떻게 히바에 갈까를 고민해 보았지만 딱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부하라에 있는 여러 군데 여행사에 들러서 동행자를 구해보았지만 히바로 가겠다는 여행자는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캬라반 바자르 앞에 있는 버스터미널에 가서 일단 부딪혀 보는 수밖에.

내일 히바로 출발한다. 타쉬켄트를 떠나고 나서 계속 서쪽으로 그리고 점점 작은 도시로 이동해 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2005년 7월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몽골-러시아(바이칼)-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키즈스탄을 배낭여행 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2005년 7월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몽골-러시아(바이칼)-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키즈스탄을 배낭여행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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