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그녀의 솜씨에 놀랐습니다!

[어머니의 손맛 재현하기 ③] 이번엔 제 여자친구가 나섰습니다.

등록 2006.01.06 10:05수정 2007.08.0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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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정말 걔네 엄마가 해준 거 아냐?"


제 여자친구는 각종 영화제를 쫓아다니며 일을 배우더니, 기어이 이번 모 멀티플렉스 영화관 영사실 파트타이머로 들어갔습니다. 영사 기술은 배울 곳이 마땅치 않아, 극장에 들어가 배울 기회를 얻고 싶어했고, 게다가 그녀가 들어간 곳이 나중에 정규직으로 들어가고 싶은 곳이기도 한지라 무척 좋아했습니다. 일의 특성상 예전처럼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1월 5일, 날을 잡아 저랑 같이 장을 보고 이런 저런 반찬을 만들어놓고 돌아갔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 아버지가 '정말로 00가 한 거야? 걔네 엄마가 해준 게 아니고?(언론매체에 이름이 나오는 게 부담스럽다고 하여 00처리합니다)'라고 할 만큼 예상 외의 솜씨를 보이고 돌아갔습니다. 매일 무얼 먹을까 걱정하는 저로서는 무척 고마운 일이지만, 그녀가 돌아간 후 만들어놓은 반찬들을 보고 있자니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썼던 기사들 가운데 어머니 손맛을 재현하겠다며, 계란말이며, 감자튀김 등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요리인데도, 계란말이는 태우고, 감자튀김은 덜 익었던 아픈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쉬운 요리도 힘들어했던 저에 비해서 그녀는 여러가지 요리를 예상 외로 짧은 시간에 후딱 해치우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그녀가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청국장이었습니다. 지난 주말 새해가 되어 청주에 있는 어머니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그 때 그녀도 같이 따라갔다가, 작은 아버지 집에서 같이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때 작은 어머니가 청국장을 하는 것을 보았고, 그걸 기억했다가 다시 재현해낸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a 예상 외로 시골 집과 비슷한 맛이 우러나왔습니다.

예상 외로 시골 집과 비슷한 맛이 우러나왔습니다. ⓒ 양중모

'그래, 직접 하는 걸 보고 했으니, 인터넷상에서만 자료를 찾은 나보다 잘하는 게 당연해!'


이런 제 위안은 금방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녀가 시도한 오징어채볶음, 메추리알 조림, 어묵 등은 그녀 역시 다 인터넷에 설명되어 있는 요리법을 보고서 만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어려운 요리는 아닐지라도 저라면, 하루에 하나씩 소화해내기도 힘든 요리들을 척척 하는 것을 보면서 알 수 없는 허무함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모 일간지에서 '아내 없이 살면 대부분의 남자들이 1달 이내 폐인 모드가 된다'는 기사를 보고 비웃었건만, 그녀가 요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몇 십 년 후에 그 기사의 주인공이 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청국장 이후에 그녀가 과감히 감행한 요리들은 청국장만큼 감탄을 안겨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녀가 오징어채 볶음을 한 후 제게 맛을 보라고 했을 때 사실 그건 설탕에 가까웠습니다.

a 사실 오징어채 볶음의 맛은 정체 불명이었습니다.

사실 오징어채 볶음의 맛은 정체 불명이었습니다. ⓒ 양중모

맞을 것을 각오하고, 솔직히 말했더니, 이번에는 그녀가 고추장을 넣어 열심히 비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맛을 보라고 합니다. 아, 그건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든 맛이었습니다. 참 요상한 맛이었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그녀가 만들었는데, 맛이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집요하게 묻는 그녀의 물음에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너도 혀가 있잖아."

그녀가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웃으면서 좋아합니다. 스스로도 맛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던 모양입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여자들이 웃으면서 때릴 때는 힘이 없어 보일 듯하지만, 정말 아픕니다. 맞아보면 압니다.

이 후 제게 내려진 과제는 중간 중간 설거지하기였습니다. 어차피 다시 쓸 것을 왜 설거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랜 연애 생활을 한 덕에 여자친구의 말은 어지간하면 그냥 들어주는 게 몸에 이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별 다른 말없이 설거지를 했습니다.

설거지는 벌써 3년 정도 몸에 배어 힘들지 않았습니다만, 정작 절 괴롭힌 건, 메추리 알 까기였습니다. 그녀가 다른 반찬을 만드는 동안, 전 의자에 앉아 메추리알을 까야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무척 귀찮았습니다. 그래도 좀 하다 보니 빨리 까는 법과 쉽게 까는 법을 대강이나마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a 아, 메추리알 까는게 이렇게 힘들줄이야

아, 메추리알 까는게 이렇게 힘들줄이야 ⓒ 양중모

"먹지마! 얼마 있지도 않은데!"

유난히 식탐이 많은 제 속을 꿰뚫고 있는지라 뒤돌아 선 상태에서도 까면서 먹지 말라고 제게 주의를 주는 그녀가 은근히 얄미웠지만, 그녀 말이 맞는지라 들고 있던 메추리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녀가 선택한 세 번째 요리는 어묵을 볶은 것입니다. 꽈리 고추랑 고추 가루 등을 넣고 열심히 만든 후 또 다시 제게 맛을 보라고 합니다.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맛있긴 한데, 왜 이렇게 기침이 자꾸 나지?"
"어, 왜 그러지, 고춧가루 때문에 그런가?"

아 그랬습니다. 맛은 괜찮았지만, 고춧가루를 너무 많이 넣었는지 자꾸만 기침이 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 뚝딱 뚝딱 잘 만들긴 하는데, 2% 부족한 면이 있긴 했었던 듯싶습니다. 어묵을 완성시킨 후 마지막으로 만든 요리는 메추리알 조림이었습니다. 메추리알 조림을 옮겨 담는데, 두 알이 식탁 아래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a 오뎅에 붙어있는 고춧가루때문인지 자꾸만 기침이 났습니다.

오뎅에 붙어있는 고춧가루때문인지 자꾸만 기침이 났습니다. ⓒ 양중모

"어,어, 안 돼."

그녀와 저 둘 다 반사적으로 막아보려고 했지만, 결국 메추리알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메추리알을 떨어지지 않게 잡으려 했는데, 메추리알이 바닥에 떨어지자, 저도 모르게 바닥에 떨어진 메추리알을 잡아서 입 속에 넣어버렸습니다. 넣고 나서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찌할 도리는 없었습니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몇 가지 반찬이 완성되었고, 그녀는 그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께서 정말 그녀가 한 게 맞냐며 흡족해 하실 만큼, 정말 의외로 그녀가 분전한 하루였습니다. 예전 어머니 손맛과 같은 맛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제 요리에서 여전히 부족한 한 부분을 그녀는 어떻게 채우는지 분명히 아는 듯 했습니다.

a 완성품입니다. 메추리알은 다른 그릇에 옮기기 전입니다.

완성품입니다. 메추리알은 다른 그릇에 옮기기 전입니다. ⓒ 양중모

오늘따라 그녀가 그리도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귀찮을 텐데도, 피곤할 텐데도, 저와 제 아버지를 위해 자신이 먼저 나서서 이것저것 챙겨주겠다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래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에게 결국 한 마디 해야겠습니다. 크리스마스도 지났으니, 솔로이신 분들께 염장질 좀 해도 괜찮은 것이겠죠?

"사랑해~!"

덧붙이는 글 | 오랜만에 여자친구와 있었던 일을 기사화합니다. 사실, 이전 기사를 찾아보시면, 그녀가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지만, 초상권을 들먹이는 그녀이기에 더 이상 쉽게 그녀 사진과 이름을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떤 이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녀에게 기사료 절반을 주어야 한다는 얘기까지 하더군요.

덧붙이는 글 오랜만에 여자친구와 있었던 일을 기사화합니다. 사실, 이전 기사를 찾아보시면, 그녀가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지만, 초상권을 들먹이는 그녀이기에 더 이상 쉽게 그녀 사진과 이름을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떤 이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녀에게 기사료 절반을 주어야 한다는 얘기까지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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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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