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미워하더니 이제는 닮아가나

[김종배의 뉴스가이드] 박근혜 대표, 이회창식 '제왕적 총재'로 가나

등록 2006.01.06 10:13수정 2006.01.06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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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5일 오전 염창동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원희룡 최고위원에 대해 "자기가 소속된 당의 대표에 대해서 존경심은 바라지도 않지만 막말은 삼가야 한다"고 불쾌감을 드러낸 뒤,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화났다. 자신을 향해 "이념병"을 거론한 원희룡 의원 때문이다. 박 대표는 어제(5일) 원 의원을 향해 "열린우리당 대변인이냐"는 식으로 따져 물은 뒤 최고위원회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대단히 섭섭했던 모양이다. 국가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엄동설한에 거리로 나선 자신에게 "이념병" 운운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박 대표 나름대로는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해 대놓고 역정을 낸 것 같다.

그래도 박 대표는 공인이다. 제1야당 대표다. 감정 분출은 자제해야 하고, 언행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국회의장을 "시체"로 비유한 이규택 의원, "국회의장의 모가지를 잡아 뽑아야 한다"고 말한 송영선 의원에 대해 박 대표가 어제처럼 역정을 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박 대표는 원 의원을 향해 "인신공격성 인터뷰가 도를 넘어섰다"고 했는데 보호돼야 할 인신에도 구별이 있던가?

원 의원이 자신을 향해 "편협한 국가정체성 이념에 갇혔다"고 비판한 게 일방적이고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참여정부를 "전교조의 하수인"으로, 전교조를 친북 좌파 용공 집단으로 딱지 붙인 자신의 일방적 재단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보호돼야 할 인신에 '왕후장상'이 따로 있나

그렇다고 치자. 남과 나는 다르게 보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그냥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짚어야 할 건 따로 있다.

박 대표는 지난달 15일 열린 의원총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제 한나라당 의원 한 분이 인터뷰에서 당의 장외집회에 반대하는 의원이 과반이 넘는다고 했는데 장외집회는 의총에서 결정한 것이다. 반대하는 분이 있다면 의사표시를 해달라." 장외집회를 비판한 고진화 의원을 향한 말이었다.

두 주 뒤인 지난달 28일 열린 의원총회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장외집회 지속 여부를 놓고 의원 간에 격론이 오갔지만 박 대표가 연단에 나가 눈물 한 방울 흘리자 상황은 일거에 정리됐다. 자신의 이념적 편협성과 장외집회의 무모함을 지적한 의원들을 향해 북한의 총탄에 사망한 어머니와 자신의 대북 유화노선을 대비시킨 뒤 흘린 눈물이었다.

어제 최고위원회의 장면까지 포함해 모두 세 막으로 구성된 풍경은 한나라당의 상태가 어떤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박 대표가 한 마디 하면 추종하는 의원들이 맞장구를 치고, 그러면 판은 정리된다. 어제 최고위원 회의에선 이규택 의원이 원 의원을 향해 "당을 떠나라"고 했고, 지난달 15일 의총에선 심재철 의원이 "퇴출합시다"라고 동의를 구했으며, 지난달 28일 의총에선 박수가 터져나왔다.

원 의원은 오늘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딱지 붙이고 왕따 시킨다." 그래서일까? 익명을 전제로 장외집회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언론에 말하는 의원은 적지 않은데 공개적으로 이 의견을 밝히는 의원은 찾기 힘들다.

소속 의원들을 도열시키고 생각이 다른 의원을 왕따 시키는 박 대표의 모습은 누군가와 닮아있다. '제왕'으로 통했던 이회창 총재 말이다.

지난달 15일과 28일, 올해 1월 5일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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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12월 17일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 후보와 박근혜 선대위원장이 대전·충청 유세를 가기 위해 서울 영등포 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제왕적 총재'를 그 누구보다 앞장 서 비판했던 사람이 바로 박 대표였다. 박 대표는 2002년 2월 28일 부총재로 있던 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그 명분으로 총재 1인 지배체제를 꼽았다. 당시 박 대표의 탈당 기자회견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저는 … 비생산적인 대결의 정치를 종식시키고 국민이 신뢰하는 정치, 국민의 힘을 모으는 화합의 정치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한나라당의 1인 지배체제의 늪에서 벗어나 국민정당, 민주정당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 한나라당은 책임 있는 민주정당, 국민정당으로 거듭나 국민의 신뢰를 받느냐, 아니면 총재 1인을 위한 정당으로 남느냐 하는 기로에서 국민적 여망을 외면하는 불행한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박 대표는 당시에 정당개혁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으나 벽에 부딪힌 느낌이라고 말했다. 정당개혁의 핵심과제였던 국민참여경선이 모양새만 갖추는 선에서 그쳤다며 "제왕적 총재의 1인 지배체제가 종식될 때에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도 했다. 제도보다 운영이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그러고 나서 4년이 흐른 지금, 박 대표는 다른 말을 하고 있다. 당의 민주적 운영을 주장하던 목소리는 "의총에서 결정됐으니 따르라"로 바뀌었고, "국민적 여망을 외면하는 불행한 선택"을 우려하던 자세는 사학법에 대한 국민 여론이 어떻든 내 갈 길 간다는 단호한 자세로 바뀌었다.

박 대표는 국가정체성을 입에 달고 있지만 정작 되짚어야 할 건 따로 있다. 자기 정체성이다. 한나라당도 곱씹어야 할 게 있다. 당 정체성이다.

부총재일 때와 대표일 때의 당 운영방식이 다르다는 지적에 박 대표는 뭐라 답할 것인가? 4년 전이나 지금이나 1인자에 줄 서는 당 속성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지적에 한나라당은 또 뭐라 답할 것인가?

장외집회가 없는 날만이라도 시간 내서 고민하고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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