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머리에 털모자 씌우듯

미치고 싶을 때가 있다

등록 2006.02.13 14:16수정 2006.02.13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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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라 하기엔 늦은 시간에 쉼터에 들어서자 털모자를 쓴 눈사람이 익살스럽게 웃고 있었습니다. 지난주 쉼터에 있던 친구들이 눈을 치우며 눈사람을 만들고는 멋을 낸다고 모자를 씌운 것입니다. 마치 피사의 사탑이 기운 듯 갸우뚱하게 선 눈사람은 털모자가 무척 따뜻해 보였습니다. 날이 풀려 녹아갈 마당에 웬 털모자냐고 하면 할 말이 없겠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 주는 풍경이었습니다.


a 기울어져 익살스런 표정을 한 털모자 쓴 눈사람

기울어져 익살스런 표정을 한 털모자 쓴 눈사람 ⓒ 고기복

볕이 들지 않는 쉼터 현관에서 한참 동안 눈사람을 쳐다보다 사무실로 들어섰습니다. 일요일에 쉼터를 찾는 많은 외국인이주노동자들로 인해 휴무를 월요일로 정했지만, 월요일이라고 쉬는 여유를 찾는다는 건 언감생심입니다. 일요일에 받았던 상담들 때문입니다.

쉼터를 찾는 사람들이 홍보전단지 한 번 돌린 적 없고, 소식지 한 번 낸 적 없는 우리 쉼터까지 대체 어느 지역에서 일하다 무슨 이유로 찾아오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어제 받았던 상담일지 가운데, 제 컴퓨터의 인도네시아 상담건만 한 장씩 들추며, 지역을 헤아려 봤습니다.

안성 6명(최저임금), 전북 임실 3명(부도, 임금체불), 경기 양주 2명(잔업계산 문제), 경기광주 2명(근로계약위반, 기본급 문제), 경기광주 1명(산재), 전북나주 12명(잔업계산, 강제적립금), 경북칠곡 3명, (근로계약만기, 사업장변경, 강제추방협박), 김포 1명(산재), 경기광주 1명(산재), 천안 1명(근무처변경, 추방), 안양 1명(산재), 화성 4명(최저임금, 근로계약위반), 경기광주 1명(야근수당), 김포 1명(퇴직금, 국민연금, 적금), 수원 1명(퇴직금), 안산 1명(유해환경, 근무처변경), 수원 1명(최저임금, 고용주변동), 오산 1명(퇴직금), 화성 4명(퇴직금), 부천 1명(근무처변경).

위에 50명이 기록돼 있는데, 다른 컴퓨터에 기록된 것은 정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요일 하루에 받은 상담인원이 50명을 넘고, 건수로만 20건이 넘습니다. 베트남을 비롯한 나라와 옆에 있는 컴퓨터를 뒤지면, 건수는 그 두 배로 뛰고, 상담인원도 역시 두 배로 뛸 것입니다. 상담을 기다리다 교통 문제로 그냥 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중에 받는 상담까지 하면, 그 숫자는 또 뛸 것입니다. 일주일에 받는 상담만 해도 우리 쉼터가 감당하기엔 숨이 찰 노릇입니다. 그래서 멀리 나주에서 온 건 같은 경우는 연대단체에 넘겨 협조를 구하고, 다른 여러 건도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 중 상당수는 다시 우리 쉼터를 찾아올지 모릅니다. 언어 문제 혹은 상담진행 중 생긴 문제로...


이건 정말 '미친 짓'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문제를 안고 오는 사람들은 문제를 한 번 던져놓고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고, 왜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느냐, 언제 해결되느냐고 빚 독촉을 하듯 따지는 사람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이런 일을 하면 돈이 생겨서 하는 일일 거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덕택에 이러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들과 소문들이 나돌기도 합니다.


어제는 수원에서 저의 인도네시아식 이름과 우리 쉼터 이름을 팔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멀리 안산에서 온 아구스(Agus)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전해 줬습니다. 의정부에서는 우리 쉼터이름을 파는 사람이 있다고까지 하더군요. 물론 저도 그런 소리를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기에 웃고 넘겼습니다.

매일 상담에 치이고 시달리며 스트레스를 받는 우리 쉼터는 실무자들이 현지어가 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많은 내담자들이 있고, 상담진행이 빠른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쉼터 이름을 악용하는 짝퉁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덕택에 늘 경제적으로 쪼들리면서도 이름값을 톡톡히 하며, 수원에 있는 누구누구냐는 전화를 받기도 하고, 의정부에 쉼터를 낸다는 게 정말이냐는 전화를 받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머리 끝까지 피가 역류하는 경험을 하면서, 이 미친 짓을 왜 하고 있는지 늘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그러면 "너는 나를 좇으라"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이 저로 하여금 자세를 곧추 세우게 합니다. 가난한 자, 눌린 자와 함께 하셨던 예수님의 발걸음을 좇기엔 어림없는 사람이지만, 한 번쯤 눈사람 머리 위에 털모자를 씌워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짓 정도는 따라 할 수는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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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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