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의 할머니가 광화문 네거리에 선 이유

한미연합전시증원연습 규탄 통일원로 1인 시위

등록 2006.03.28 12:28수정 2006.03.2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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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이 지난 따듯한 봄날이라 해도 광화문 네거리는 여전히 찬바람이 거세다.

황사바람과 더불어 소란스런 도심 한가운데 백발의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미대사관을 향하고 있다. 매주 주말이면 집회와 행사로 떠들썩한 이곳에 예쁘지는 않지만 조목조목 써 내려간 피켓과 함께 그 노구의 당당함은 오고가는 이들의 이목을 끈다.

한미연합전시증원연습이 25일부터 진행되는 것과 맞물려 통일운동 원로들이 1인 시위에 나섰다.

25일 낮 12시, 한-미간 군사연습 규탄 1인시위에 가장 먼저 나선 분은 박정숙 선생(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이다. 박정숙 선생은 올해 나이 아흔이신 통일운동원로 중에서도 원로이며, 해방직후 철원군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셨던 큰언니의 영향으로 통일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 번의 옥고를 치른 선생님의 삶이 말하듯 평생을 통일운동에 헌신하신 분이다. 박정숙 선생님은 1인 시위를 나서신 이유에 가장 먼저 '미안하다'는 말로 말문을 여셨다.

a 범민련남측본부 박정숙 고문

범민련남측본부 박정숙 고문 ⓒ 김명섭

"내가 평생 통일운동을 한다고 했는데, 아직도 통일이 되어 있지 못해 젊은이들을 볼 때 미안합니다. 하지만 기운이 닿는 데까지 이렇게 해야지요. 해방이 되고 나서 미군이 들어올 때 해방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우리(남과 북이)가 서로 통일하자고 하면 사사건건 트집 잡고 방해하는 게 미국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미군에 대해 분노하기 시작했지요.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고 이제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도 합치고, 왔다 갔다 하는데, 전쟁연습이 뭐가 필요합니까?"

수줍은 듯 대답하시며 간혹 기자를 바라보는 눈은 분명 소녀의 눈망울이다. 아흔을 넘긴 선생에게 전쟁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한국야구 WBC 4강 신화의 환호 저편에 진행되는 한-미간의 군사연습은 선생님에게 신문 한편에 자리한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경험한 전쟁의 참혹함과 더 이상 후대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리라 생각한다.


같은 날 이어서 1인시위로 나선 분은 김선분 선생(현재 범민련서울시연합 고문)으로 박정숙 선생을 '언니'라 부르신다. 감옥에서 박정숙 선생을 만나 지금까지도 자매처럼 함께 살고 계신 김선분 선생은 전쟁의 참혹함을 더욱 힘주어 말씀하신다.

a 범민련서울시연합 김선분 고문.

범민련서울시연합 김선분 고문. ⓒ 김명섭

"6·25전쟁 때 우리 민족이 얼마나 많이 죽어 나갔습니까? 그런 희생을 치르고도 또 전쟁연습이 뭡니까, 이미 미군과 한국군이 북침을 계획하고 벌이는 전쟁연습이라니 가슴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전쟁은 곧 우리 민족의 불행임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작은 것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정돈되지 않은 몇 마디 말이지만 1994년 우리 국민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던 사이 한반도가 전쟁의 나락으로 빠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는 역사적 사실만을 놓고 보더라도 선생님은 분명 자신의 몸으로 실천으로 전쟁을 막고자 한다.

27일 낮 12시 미대사관 앞에서는 김규철 선생(범민련서울시연합 의장)을 만나 뵐 수 있었다. 김규철 선생은 서울지역에서 왕성한 활동으로 집회현장 곳곳에서 누비며 통일운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앞서 1인 시위에 나선 두 분에 비해 김규철 선생의 말씀은 더욱 단호하다.

"작금의 시대는 제2의 6·15시대라고 합니다. 통일운동에 민관이 따로 없고 민족대단합 운동도 광범위하게 펼쳐지고 있어요. 이렇게 남과 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단결하자고 하니 미국 놈들은 어떻게든 이걸 막아보고자 북핵문제니, 위폐문제니, 북인권문제니 하는 것을 들고 나서 방해합니다. 전쟁연습은 더욱 구체적으로 한반도에 위기를 만드는 겁니다.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북침을 계획하고 벌이는 군사연습은 적극 막아나서야 합니다."

a 범민련서울시연합 김규철 의장.

범민련서울시연합 김규철 의장. ⓒ 김명섭

31일까지 실시되는 연습에는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진 대로 미국 본토와 하와이, 오키나와 주재 미군 3천여 명과 주한미군 1만7천여 명 등 2만여 명의 병력과 스트라이커부대 등이 참가한다.

최근 동북아 정세의 가장 민감한 소위 북핵문제가 6자회담 기본합의를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가운데, 실시되는 한-미간의 군사연습은 다시금 한반도의 긴장고조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종로거리에서 우연히 부딪히는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의 '니들이 6·25를 알어?, 너희들이 전쟁을 안 겪어 봐서 그러지'라는 물음과 탄식과는 반대로, 20대 젊은이들 절반가량은 6·25가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모른다고 한다.

작년 6·25를 즈음하여 어느 일간지에서 20대를 대상으로 6·25가 언제 일어났는가? 라는 질문에 1950년이라고 정확하게 대답한 사람은 46%에 그친다. 이 사실로 우리 민족이 겪었던 전쟁의 기억이 잊혀져 가고 있음을 역설하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a 전쟁연습 중단하라.

전쟁연습 중단하라. ⓒ 김명섭

민족의 뼈아픈 전쟁의 기억은 당연히 잊혀져야 한다. 하지만 전쟁을 불러 오는 근본 원인들도 우리들의 기억과 함께 사라져야 한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존재한다고 밝혀진 작전계획 5026, 5027, 5028, 5029, 5030, 8022는 언제든 계획이 아닌 실제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미국의 걸프전이 그랬고, 이라크전이 그랬으며 1994년 한반도 북핵위기 때 상황도 그러했다.

김선분 선생은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전했다.

"사람이 사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민족에 대한 고민을 할 줄 알고, 불의에 저항할 줄 알고, 우리 민족이 갈라져 사는 것이 나쁘고, 나쁜 것을 바꿔나가는 젊은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6월 월드컵의 열기가 다시금 후끈 달아오르고, 한국야구 WBC 4강 신화의 환호 속에서도 우리 민족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드리워진 전쟁의 검은 그림자도 함께 날려버려야 하지 않을까, 이제 백발의 할머니의 소망을 젊은 우리 대가 현실로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범민련서울시연합은 군사연습기간동안 소기수 부의장, 류종인 감사가 1인 시위에 함께할 예정이며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서울연합 이천재 의장도 계속 1인 시위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범민련서울시연합은 군사연습기간동안 소기수 부의장, 류종인 감사가 1인 시위에 함께할 예정이며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서울연합 이천재 의장도 계속 1인 시위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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