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지, 차마 발을 디딜 수가 없었어요.

봄꽃이 만발한 전남 완도 상황봉을 찾아

등록 2006.04.10 10:11수정 2006.04.10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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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래를 펴 들고 물에 몸을 내려앉는 찰나, 멈추어진 그 찰나의 수만 마리의 새들처럼, 그렇게 '얼레지'는 그 능선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래를 펴 들고 물에 몸을 내려앉는 찰나, 멈추어진 그 찰나의 수만 마리의 새들처럼, 그렇게 '얼레지'는 그 능선에 앉아 있었습니다.서종규
호수, 물위에 내려앉는 새들이 생각났습니다. 하늘을 날던 새들이 물위에 앉는 순간의 모습, 나래를 펴 들고 물에 몸을 내려앉는 찰나, 멈추어진 그 찰나의 수만 마리의 새들처럼, 그렇게 얼레지는 그 능선에 앉아 있었습니다.

종이학처럼, 그것도 연보라빛 종이로 접은 수만 마리의 종이학이 능선 위에 흩어 뿌려져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날개와 고개를 들어 올린 종이학처럼, 여섯 개의 꽃잎을 곧게 세운 얼레지는 그렇게 우리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상황봉에 오르는 길과 상황봉에서 숙승봉의 능선까지 약 10km 내내 하늘에서 쏟아진 별처럼 얼레지는 뿌려져 있었습니다.
상황봉에 오르는 길과 상황봉에서 숙승봉의 능선까지 약 10km 내내 하늘에서 쏟아진 별처럼 얼레지는 뿌려져 있었습니다.서종규
둥근 잎에서 솟아 나온 꽃대에 연보랏빛으로 핀 여섯 개의 꽃잎은 모두 하늘을 향하여 솟구쳐 있습니다. 고고한 학들의 자태를 그대로 간직한 채 말입니다. 아마 신선들이 타고 온 학들이 땅에 내려와서 그대로 머무는 모양입니다.

등산로를 벗어난 능선은 말할 것도 없고, 등산로까지 가득 펼쳐진 얼레지 군락, 발에 밟힐까 봐 차마 발을 디딜 수가 없었습니다. 완도 상황봉에서 숙승봉까지 10km의 능선을 따라 계속 피어 있는 얼레지의 잔치에 우리들의 발걸음은 너무 조심스러웠습니다.

완도 상황봉 10km의 등산로에는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가득하였습니다.
완도 상황봉 10km의 등산로에는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가득하였습니다.서종규
4월 8일(토), 산을 좋아하는 '풀꽃카페 토요산행팀' 35명이 아침 8시에 광주에서 완도 상황봉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시원스럽게 펼쳐진 남도의 벌판에 파란 보리밭은 보기에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짓궂은 황사가 푸른 보리밭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완도까지 가는 길마다 가로수로 심어진 벚꽃이 환하게 길을 밝혀 주고 있었고, 언덕 사이사이 분홍 진달래가 마음을 설레게 하였습니다. 가금 하얗게 은하수처럼 띠를 이루고 있는 조팝나무꽃도 반가웠습니다.

10시 30분, 대구미 마을이라는 표지석이 덩그렇게 세워져 있는 곳엔 벌써 봄꽃들이 가득했습니다. 노란 민들레 옆에 하얀 민들레가 돋보였습니다. 개불알풀꽃과 광대나물꽃이 논두렁 밭두렁에 가득하였습니다. 첫 발부터 펼쳐진 봄꽃의 향연이 우리들의 발걸음은 붙잡았습니다.


보랏빛 꽃잎을 달고 땅에 붙어 피는 모습이 앙증맞은 각시처럼 예쁘다고 해서 '각시붓꽃'이라고 한대요.
보랏빛 꽃잎을 달고 땅에 붙어 피는 모습이 앙증맞은 각시처럼 예쁘다고 해서 '각시붓꽃'이라고 한대요.서종규
10km의 상황봉 등산로에는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가득하였습니다. 꽃잎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꽃이 떨어진다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동백꽃이 땅에 내려와 앉아 있습니다. 꽃잎은 아직도 선홍빛 꽃잎에 노란 꽃술을 그대로 간직한 채 동백나무 아래에 떨어져 있었으니까요.

우리들은 봄꽃을 보며 꽃 이야기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사진에 담는 사람들 때문에 시간이 또 지체되었습니다. 붓꽃이 땅에 바짝 붙어 피어 있었습니다. 각시붓꽃이랍니다. 붓꽃은 대체로 물가에 많이 피는데, 이 각시붓꽃은 메마른 산 능선에 피어있었습니다. 보랏빛 꽃잎을 달고 땅에 붙어 피는 모습이 앙증맞은 각시처럼 예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래요.


작고 앙증맞은 꽃잎들의 고대 군악대의 나팔을 이루듯, 치솟아 오르는 무희의 치마처럼 층층을 이루며 장식이 된 '현호색'이래요.
작고 앙증맞은 꽃잎들의 고대 군악대의 나팔을 이루듯, 치솟아 오르는 무희의 치마처럼 층층을 이루며 장식이 된 '현호색'이래요.서종규
보랏빛 현호색도 군락을 이루고 있었답니다. 작고 앙증맞은 꽃잎들의 고대 군악대의 나팔을 이루듯, 치솟아 오르는 무희의 치마처럼 층층을 이루며 장식이 된 현호색도 작고 앙증맞게 피어 있었습니다.

노랑제비꽃과 양지꽃은 비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노랗게 웃고 있었습니다. 보랏빛 제비꽃들 사이에서 흰제비꽃도 당당하게 그 얼굴을 들고 우리들을 맞고 있었습니다. 작고 앙증맞기는 구슬봉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보랏빛을 띄는 구슬봉이는 그 이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밤에 하늘에서 내려와 이곳 상황봉에서 놀다고 그대로 남아버린 '별꽃'이랍니다.
밤에 하늘에서 내려와 이곳 상황봉에서 놀다고 그대로 남아버린 '별꽃'이랍니다.서종규
어찌 그리 작고 앙증스러운 꽃들이 땅에 바짝 붙어서 우리들을 맞이하는지, 땅에 눈을 마주치며 그들과 인사하기에 바빠 발걸음은 더욱 느려졌습니다. 겨우 큰 바위에 앉아 한 숨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바위 틈새에, 글쎄 그 하얀 별꽃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잘못하였다간 그 별꽃을 밟아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별꽃과 비슷한 모습으로 산자고도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꽃잎을 다물고 있어서 길쭉한 쭉정이 모습인데, 반가운 사람에겐 별 모양으로 그 얼굴을 펼치고 인사를 하는가 봅니다. 우리에게 하얀 꽃잎 여섯 개의 청순한 별 모양으로 방긋 웃고 있었다니까요.

참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사이사이 분홍빛 진달래의 아름다움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꽃 자랑하고 싶어서 진달래는 말할 기회가 없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도 가장 친근한 진달래였기에 그냥 넘어가도 서운해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구요.

'산자고'는 보통은 꽃잎을 다물고 있어서 길쭉한 쭉정이 모습인데, 반가운 사람에겐 별 모양으로 그 얼굴을 펼치고 인사를 하는가 봅니다.
'산자고'는 보통은 꽃잎을 다물고 있어서 길쭉한 쭉정이 모습인데, 반가운 사람에겐 별 모양으로 그 얼굴을 펼치고 인사를 하는가 봅니다.서종규
상황봉 중간 정도에 오르고 있는데, 그렇게 보고 싶었던 꽃이 눈에 다가왔습니다. 바로 얼레지였습니다. 상황봉에 오르는 길과 상황봉에서 숙승봉의 능선까지 약 10km 내내 하늘에서 쏟아진 별처럼 얼레지는 뿌려져 있었습니다.

출발점에서 상황봉(664m)까지의 거리는 3.5km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상황봉까지 거의 두 시간 반이나 걸려 오후 1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만큼 앙증맞은 봄꽃들이 우리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봉우리를 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늘 하늘을 밟는 기분입니다.
봉우리를 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늘 하늘을 밟는 기분입니다.서종규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었지만, 황사로 푸른 바다는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최근에 개통한 완도와 신지도를 연결하는 다리도 흐릿하였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섬이라는 느낌을 황사가 잡아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점심을 먹고 오후 2시에 백운봉-업진봉-숙승봉에 이르는 능선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가는 길도 모두 동백나무와 후박나무의 사이로 난 있었습니다. 시원한 상록수 아래를 걷는 기분이 어떠한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여름 산행이었다면 그 시원함이 두 배나 되었을 것입니다.

시원한 상록수 아래를 걷는 기분이 어떠한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여름 산행이었다면 그 시원함이 두 배나 되었을 것입니다.
시원한 상록수 아래를 걷는 기분이 어떠한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여름 산행이었다면 그 시원함이 두 배나 되었을 것입니다.서종규
적당하게 어우러진 바위들로 이루어진 백운봉(601m), 이름이 특이한 업진봉(544m), 멀리서 바라보면 스님이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숙승봉(461m)까지 오르내리는 길은 평탄하였습니다.

오후 5시, 숙승봉 아래 완도 청소년 수련원과 장보고 촬영지 '신라방' 입구에 내려왔습니다. 아직도 <장보고> 촬영지인 '신라방'을 보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주위에는 장보고 역을 하였던 최수종 등 분장한 모습의 배우 사진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꽃과 인사하며 출발하였던 완도 상황봉 능선의 산행은 마지막 장보고 촬영장 입구에 떨어져 있는 동백꽃잎을 보며 마감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자라고 있는 얼레지를 몽땅 모아다가 심어 놓은 듯한 전남 완도 상황봉 능선에서 맞은 봄꽃들의 잔치, 또 주말이 되면 가까운 산이라도 찾아야 할 이유인 것 같습니다.

꽃잎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꽃이 떨어진다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동백꽃'이 땅에 내려와 앉아 있습니다.
꽃잎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꽃이 떨어진다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동백꽃'이 땅에 내려와 앉아 있습니다.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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