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덕정, 정조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다.김정봉
눈여겨볼 만한 다른 한가지는 북쪽 창방의 현판이다. 정조가 집권 말기인 정조 22년(1798년)에 쓴 것으로 자신을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즉 만 갈래 시내와 강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라 칭하며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는 생각을 드러내 보인 현판이다. 개혁을 하려 했으나 그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하여 번번이 좌절되자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을 관철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는 반대로 왕권에 도전하는 양반 관료세력이 그 만큼 컸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지를 내보이기보다는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지 못하는 마음을 한탄 한 것으로 봄이 좋을 듯하다. 이 때문에 집권 초기에 규장각을 지어 정조의 정치 의지를 내보인 부용지 영역이 정조의 꿈이 담겨 있는 곳이라면, 존덕지 영역은 정조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존덕정 옆으로 특이하게 놓인 넓적하고 얇은 돌을 따라 걸으면 '폄우사'가 있다. 이 돌을 따라서 걸으면 자연스레 팔자걸음을 할 수밖에 없는데 세자가 걸음걸이를 연습하는 돌이라 전한다. 왼쪽 두 칸은 온돌방이며 오른쪽 한 칸은 누마루로 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다. 폄우라 하면 '어리석은 자에게 침을 놓는다'는 뜻으로 온돌방이 딸린 건물이기에 이 곳에서 쉬는 왕을 경계하는 뜻으로 지은 듯하다.
존덕지를 벗어나 언덕길을 오르면 옆에 느티나무, 단풍나무, 떡갈나무 등 활엽수로 울창한 숲이 있고, 숲 속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청심정이 오롯히 서 있다. 청심정은 옥류천을 보고 연경당 쪽으로 내려가는 곳에서도 볼 수 있는데 정면 측면 1칸의 사모지붕을 한 단출한 정자이다.
산등성이에 오르면 비교적 큰 정자하나가 서 있는데 취규정이다. 옥류천을 가다가 중간에 쉬어 가는 정자로 인조 18년(1640년)에 건립됐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다른 정자에 비해 규모가 크다. 정자는 공간의 크기에 비례하여 지어지게 마련인데, 이 정자가 세워진 곳은 다른 곳에 비해 공간적 여유가 있어 좀 크게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취규정에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후원 중에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옥류천 영역이다. 맨 앞에 취한정이 있고 조금 떨어져 후원의 아름다운 세 정자라는 뜻으로 상림삼정이라 불린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이, 오른쪽으로 농산정이 각자 제자리를 찾아 옹기종기 모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