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경찰을 위한 경찰이었다

[취재후기] 나는 왜 남대문경찰서 사건을 기사화했나

등록 2006.05.30 12:53수정 2006.05.30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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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 좀 잡아줘요, 잡아줘."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와 우리나라 팀의 월드컵 평가전이 벌어졌던 5월26일 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응원전을 촬영하고 집으로 향하던 중 한 여성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울 프레스센터 앞. 시민들의 웅성거림을 뚫고 들어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니 한 아이의 엄마가 택시를 타려는 남자를 가리키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윽고 몇 명의 남자들이 택시를 타려는 그 남자의 앞을 막아섰다. 나는 그 여성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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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냐?"
"저 사람이 우리 아이를 다치게 해놓고 사과 한마디 없이 이상한 명함만 주고 도망가려 한다."

이상한 명함? 아이의 엄마 손에 들려있는 명함을 살펴보자 '남대문 경찰서 정보과 김○○'이라고 쓰여있었다. 이어지는 아이 엄마의 목소리. "저 사람이 경찰이라는데 말도 안 된다!"

자초지종인즉슨, 그 남자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붙은 와중에 그 여성의 아이가 다치게 됐다는 것이었다. 상황을 살피기 위해 남자 옆으로 다가가자 심한 술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이때까지도 한 취객의 단순한 실수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소동의 와중에 경찰이 출동하고 그 과정에서 그 취객의 신분 또한 경찰임이 확인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다른 각도로 발전하게 됐다.


경찰이 출동하자 취객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욱 커졌다. 신분증을 요구하는 경찰관에게 "야 이XXX야. 너 죽을래 내가 누군지 알어?"라는 호통은 물론, 틈만 나면 택시를 타고 도주하려는 것까지.

김 경사는 지구대로 연행된 뒤에도 수차례 도주를 시도했다. 사진은 모범택시를 타고 도주하려는 장면.
김 경사는 지구대로 연행된 뒤에도 수차례 도주를 시도했다. 사진은 모범택시를 타고 도주하려는 장면.최윤석
출동 경찰관의 수차례 요구 끝에 그 남자가 주민등록증을 제시했을 때, 나는 믿기지 않았다. 그가 아이 엄마에게 제시한 명함과 동일인이었던 것이다. '저 사람이 경찰이라면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동료 경찰에게 설마 저렇게 심한 폭언을 퍼부을 수 있을까.' 그러나 취객은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몇 마디 나눈 후 출동경찰관에게 "야이 XXX아 받아"라며 전화기를 건네주었고, 전화를 건네받은 출동 경찰관의 얼굴엔 당황하는 빛이 어렸다.


나는 취객 김아무개씨가 연행된 태평로지구대까지 따라갔다. 김씨의 이상행동은 지구대에서도 계속됐다. 현행범으로 연행되어온 김씨는 폭행과 관련된 어떠한 조사도 받지 않은 채 경찰과 승강이를 벌이거나 폭언을 퍼붓거나 도주를 시도했다.

이쯤 되니 나도 오기가 생겼다. 경찰관이 경찰관의 시민폭행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했다. 지구대 밖에서 경찰관들과 승강이를 벌이던 김아무개씨에게 명함 한 장 줄 수 있냐고 말하자 거리낌 없이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기자에게 건네주었다. '남대문 경찰서 정보과 OOO'.

그러나 태평로 지구대 경찰들에게 "이 사람이 남대문 경찰서 정보과 소속이라고 하는데 맞냐"며 신분확인을 요청하니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지구대 경찰들은 "우린 아무것도 모르겠다, 신분확인을 하려면 직접 해 보라"며 거절했다.

결국, 김씨의 정확한 신원은 내가 직접 남대문경찰서 정보과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정보과 김아무개 경사.

무고한 시민을 폭행한 취객이 남대문 경찰서 정보과 김아무개 경사라는 게 공식적으로 확인되자 경찰들의 움직임은 더 빨라졌다. 태평로지구대로 남대문경찰서 정보과 소속 동료 경찰들이 한 명 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했고 심지어 이진구 남대문경찰서장까지 출동했다.

내 움직임도 빨라졌다. <오마이뉴스>에 전화를 걸어 이쪽의 상황을 전하고 취재기자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어수선한 사이에 김아무개 경사는 사라졌다. 행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경찰들은 "근처 어디에서 쉬고 있다"고만 답했다.

사라진 김아무개 경사를 대신해 이진구 남대문 경찰서장이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이 서장은 김 경사를 적법하게 처리하겠다는 약속 대신, 합의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어 취재 중이던 오마이뉴스 기자들에게도 비슷한 부탁을 거듭 요청했다. "다른 언론사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내용이니 오마이뉴스 측에서만 기사화하지 않는다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다, 제발 기사만은 쓰지 말아달라." 이 서장의 부탁은 취재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기사를 작성하는 중에도 계속 이어졌다.

금요일 밤의 해프닝은 결국 오마이뉴스에 의해 처음으로 기사화됐다. 본 사건을 처음 보도한 오마이뉴스를 비롯한 각종 포털 사이트의 해당기사에는 김아무개 경사의 행동을 비난하며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는 천개 이상의 댓글이 달렸다.

남대문 경찰서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도 김모 경사의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며 사건처리가 어떻게 되는지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누리꾼들의 댓글이 빗발쳤다.

누리꾼들을 더욱 화가 나게 한 것은 그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남대문 경찰서장까지 출동했다는 것이었다. 경찰서 최고 책임자가 무고한 시민에게 폭행을 행사한 부하직원을 원칙대로 처벌하지 않은 채 사건을 감추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인 게 전형적인 제 식구 감싸기 아니냐는 것이다.

자신을 현직 경찰관이라고 신분을 밝힌 한 누리꾼은 오마이뉴스 해당기사 게시판을 통해 "경찰관이 어려운 여건하에서 고생하는 파출소 직원들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몰지각한 행동으로 전체 경찰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는 것은 뭐라 변명할 여지가 없다"며 "국민이 얼마나 분노하고 실망을 하실까 하는 생각을 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픈 심정이다"고 현직 경찰관으로서의 안타까움 마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결국 김아무개 경사는 불구속 입건됐다. 경찰은 감찰조사를 벌여 징계하겠다고도 발표했다.

경찰도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법처리는 공정해야 한다. 만일, 그 자리에서 김아무개 경사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경찰조사에 순순히 응했더라면, 이런 불유쾌한 내용이 기사화돼 전체 경찰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금요일 밤, 뜻하지 않은 사건을 취재하면서 내가 느낀 심정은 바로 이런 씁쓸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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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이 좋아 사진이 좋아... 오늘도 내일도 언제든지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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