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난 효촌리 마을앞 도로는 효순·미선이 사건 이후 도로가 확장되고 보행자를 위한 인도가 설치됐다.오마이뉴스 이민정
마을 입구에서 멀지 않은 미선이의 집. 문패에 '심(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계세요"라는 외침에 집안에서 달그락거리던 수저 소리가 멈췄다. 수돗물 소리가 나는 집 뒤로 가서 다시 한 번 외치자 물소리가 뚝 끊긴다. 외지인을 요란하게 맞은 것은 마당에 묶여 있는 개 두 마리뿐이었다.
채희병 '미군장갑차 여중생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부모들과의 접촉을 도와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집회에 나오시라고 권해도 잘 안 나오시는 분들"이라고 말했다. "자식 잃은 슬픔이 오죽하겠느냐"며 기자의 양해를 구했다.
효순이의 집은 마을 깊숙이, 산자락이 시작되는 즈음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등교길에 마을을 통과해 지나가던 효순이에 대해 "인사 잘 하던 아이"라고 입을 모았다.
마을주민 김아무개(77·여)씨는 "사고 전날까지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외치던 효순이의 인사 소리가 다음날부터 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말 꺼내면 뭐해,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잖아", "죽어야 잊지",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며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인 마을회관은 시끌벅적해졌다.
40가구도 되지 않은 마을이라 마을 주민들은 아이들의 꼬맹이 시절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두 아이들의 이름은 마을의 '금기어'가 됐다. 효순이의 집을 향하던 길에 만난 주민은 "그 집에는 왜 가려고"라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주민들은 "그날이 13일이잖아"라며 사고 당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 다같이 지방선거 투표를 마치고, "투표용지가 왜 그렇게 많았냐"고 투덜대며 마을로 돌아왔다. 그날도 오늘(7일)처럼 흐른 하늘에 가랑비가 쏟아졌단다. 효순이와 미선이가 어깨동무를 하고 친구의 생일잔치에 향하던 뒷모습을 기억하는 이도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밭일, 집안일 등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아이들의 사고 소식이 전해졌다. 하던 일을 멈추고 현장으로 뛰어갔고, 그 후 며칠간 주민들은 일상에 손을 댈 수 없었단다.
부모들과 함께 병원 영안실부터 두 아이의 관이 나란히 화장터로 들어가는 것, 밥 한 술 뜨지 못하던 부모들의 끼니를 챙기는 등 일부 마을 주민들은 한몸처럼 움직였다. 전국이 붉은 물결로 술렁일 때 효촌리에서 월드컵은 관심 밖이었다. "보긴 봤는데 나라 이름들도 어렵고, 기억 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평택도 월드컵에 묻힐까 걱정"
아이들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세상을 뜬 이후 달라진 것은 2차선 지방도로의 폭이 75cm 확장된 것과 붉은 타일이 깔린 폭 1.5m짜리 인도가 생긴 것이다. 보행자를 위한 공간이 생겼지만, 마을 앞을 지나는 자동차들은 한산한 도로를 빠른 속도로 지나쳤다. 비행기 소음 같은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군용차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채희병 사무국장은 "아이들이 살아있었다면 지금 고3"이라며 "아마 4년 전과 똑같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사건 이후 월드컵 응원 인파가 열기를 그대로 촛불집회 등 추모 분위기로 이어졌다"면서도 "응원 열기만큼 사건의 진상규명에 관심을 갖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채 사무국장은 "미순·효순이 사건은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다"며 "불평등한 한미관계로 인해 여중생들을 죽인 책임자가 처벌받지 않은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군부대 확장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는 평택 대추리를 연관지으면서 "월드컵 때문에 대추리 주민들의 억울한 사연도 묻힐까봐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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