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임금의 효성과 백성 사랑으로 빚은 '화성'

국토사랑방 화성, 용주사 답사 동행 취재기

등록 2006.06.26 21:08수정 2006.06.2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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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수원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 전경.

수원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 전경. ⓒ 김영조

다달이 국토사랑방(대표 이원영)은 문화답사를 떠난다. 물론 그것은 올바른 명당찾기 공부의 하나인데 이번엔 수원의 화성을 찾았다. 화성은 지난 1997년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창덕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소중한 문화재이다.

화성은 실학과 과학의 정신, 정치사상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투철한 기록정신과 자연 존중 정신이 깃들여 있다고 한다. 팔달산을 중심으로 쌓은 화성의 둘레는 5744미터로 중국과 일본 등에서는 없는 평산성(平山城 : 평지와 산을 이어 쌓은 성의 형태)이며,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의 장점만을 살려 축성됐다.


a 화성성역의궤의 화성전도 도설을 응용한 화성지도.

화성성역의궤의 화성전도 도설을 응용한 화성지도. ⓒ 김영조

특히 화성의 축성은 정조의 효심에서 비롯됐다. 1762년(영조 38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한여름 뒤주 속에 갇혀 8일 만에 죽었다. 정조는 즉위 13년만에 억울한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려고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그곳을 자신의 이상향으로 꾸미려 화성을 지었다. 이런 이유 등으로 화성은 동양 성곽 중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화성의 축성과 관련된 사항은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 책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 둘레엔 장안문(長安門), 팔달문(八達門), 창룡문(蒼龍問), 화서문(華西門) 등 문루(門樓)가 넷이 있으며, 깊숙하고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 만든 출입구로 은밀히 사람이 드나들고, 양식 따위를 나르도록 하는 다섯 암문(暗門)이 있고, 또 물이 통과하는 수문(水門)으로 화홍문, 남수문이 있다.

그밖에 안이 비어 있는 망루로 포를 설치하거나 활을 쏠 수 있는 구멍이 뚫린 4곳의 공심돈(空心墩)과 성곽의 중간에 성곽보다 저금 높은 대를 만들어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배치해두고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4곳의 적대(敵臺), 두 곳의 노대(弩臺)가 있으며, 한 곳의 봉돈(烽墩)이 있다.

a 연무대에 있는 노둣돌에는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다.

연무대에 있는 노둣돌에는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다. ⓒ 김영조

답사는 먼저 창룡문 근처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 시작했다. 나이 지긋한 문화해설사의 화성의 의의에 대한 이야기부터 듣는다. 창룡문, 동북공심돈을 거쳐 화성에 주둔해있던 군사들의 훈련장이었던 동장대(연무대)에 이른다. 이 연무대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복원한 것인데 연무대 앞에 있는 노둣돌(하마석:下馬石)에도 총탄 자국이 서명하게 남아있어 전쟁의 아픈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연무대와 일종의 샛문인 동암문을 지나면 방화수류정에 이른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꽃을 찾고 버들을 쫓는 정자'라는 뜻인데, 수원 화성을 이루고 있는 4개의 각루 중 하나이며, 수원팔경 중 하나이기도 하다.

a 방화수류정과 용연의 아름다운 자태.

방화수류정과 용연의 아름다운 자태. ⓒ 김영조

우리 일행도 방화수류정 마루에 앉아 답사 중 피로를 잠시 푼다. 이 방화수류정에서 앞에는 버드나무가 우거진 용연이 있어 아름답지만 용연의 물이 깨끗하지 않아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a 화홍문의 수문을 통해 본 분수.

화홍문의 수문을 통해 본 분수. ⓒ 김영조

방화수류정 옆에는 아름다운 화홍문(일명 북수문)이 있는데 물길이 지나는 수문이다. 화성의 무지개를 뜻하는 화홍문이라는 이름은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으로 넘쳐나는 모습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 팔경으로 꼽았다는 설명이다.

a 멋스럽게 처마를 들어올린 장안문.

멋스럽게 처마를 들어올린 장안문. ⓒ 김영조

우리는 북동포루를 거쳐 수원성(水原城)의 남문(南門)인 장안문에 도착한다. 장안문(長安門)은 홍예문(虹渤門 :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의 반쯤 둥글게 만든 문) 위에 아름다운 단청의 2층 누각을 올리고, 바깥쪽에 둥근 옹성(甕城)을 갖추었다. 옹성은 문 바깥쪽에 벽돌로 반원형을 그리면서 쌓았으며 한가운데 홍예문을 내었다.

또 문의 좌우로는 적대(敵臺)가 있는데, 성벽 바깥쪽으로 돌출한 높은 대로 적을 좌우에서 살피고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이 문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성문 형태인 서울의 남대문과 매우 비슷하지만, 옹성이나 적대와 같은 남대문에는 없는 새로운 방어용 시설을 갖춘 점이 독특하다.

a 정조의 효성이 빚은 화성, 그 포대의 한 구멍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나온 딸의 효성이 보인다.

정조의 효성이 빚은 화성, 그 포대의 한 구멍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나온 딸의 효성이 보인다. ⓒ 김영조

그뿐만 아니라 이 장안문은 정조임금의 백성 사랑이 깃든 성문이다. 애초 정약용이 계획한 대로 성곽의 길이를 4.2킬로미터로 만들기 위해 화서문, 장안문, 화홍문 등을 일직선으로 서게 했다. 수원으로 행차한 정조는 팔달산 꼭대기에 올라 성터 전체를 내려보고 성문과 각종 시설물 등이 들어설 자리들을 확인했다.

a 정조의 백성 사랑이 빚은 꼬불탕한 성벽의 모습.(애초 4.2KM로 계획했다가  5.7km로 바뀐 사연)

정조의 백성 사랑이 빚은 꼬불탕한 성벽의 모습.(애초 4.2KM로 계획했다가 5.7km로 바뀐 사연) ⓒ 김영조

그 자리에서 정조는 북쪽의 많은 백성의 집을 헐고 장안문을 지을 것이란 영의정 채제공의 말에 "저 백성은 과거 예전 고을에서 살다 옮겨 온 사람들인데 또 집이 허물어지고 이사를 가야한다면 백성을 위해 성을 쌓고자 하는 나의 본뜻과 다르다.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저 백성의 집밖으로 성문을 쌓으라"라고 명했다.

이런 정조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장안문 터는 원래의 위치가 아닌 민가 밖으로 옮겨졌고, 성곽의 길이가 현재의 5.7킬로미터로 길어졌다.

장안문을 본 다음 우리는 화성의 핵심인 행궁으로 다가섰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사도세자의 묘소)에 참배하기 위하여 왔을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부사가 일하는 관청으로도 활용했다. 먼저 우리를 맞는 것은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이다.

a 무예24기 공연 중 창술이 시연된다.

무예24기 공연 중 창술이 시연된다. ⓒ 김영조

신풍루 앞에서는 조선의 무예인 '무예24기(武藝二十四技)' 정기공연이 수원시 주최, (사)무예24기보존회 주관으로 벌어진다. 무예24기는 정조 때에 완간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1790)에 실린 스물 네 가지 기예를 말하며, 조선조 무과(武科)의 시험과목으로 구한말 구식군대가 해체될 때까지 조선의 관군들이 익혔던 군사무예이다.

무예도보통지로 본 무예24기는 한쪽에만 날이 서 있고 칼등이 휘어진 도(刀), 양쪽에 날이 서 있고 칼몸이 곧게 뻗은 검(劍), 창(槍), 곤봉, 권법(拳法) 따위의 병장기와 맨손 무예가 망라되어 있다. 공연단은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날렵한 몸짓으로 진검과 창, 화살을 자유자재로 쓰며, 기량을 펼쳐 관객들의 큰 손뼉을 받았다.

행궁 안으로 들어가자 맨 먼저 보이는 것은 정약용이 고안한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기계, 거중기(擧重機)이다. 거중기는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적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장치인데 수원성을 축성하기 위해 필요한 석재를 운반하는데 사용했다.

더 깊숙이 들어가자 행궁의 중심 봉수당(奉壽堂)이 있다. 이 봉수당은 1795년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례를 연 건물이다. 이 회갑진찬례는 김홍도의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그림과 이 행사의 처음과 끝을 낱낱이 기록하여 책으로 펴낸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통해서 알 수가 있다. 봉수당 안에는 이 진찬례의 모형이 만들어져 있다.

우리는 봉수당을 끝으로 화성 답사는 마치기로 했다. 여기서 잠시 일행 중 한 사람은 수원을 원래의 이름인 화성으로 바꾸고, 화성은 다른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화성으로 써오던 것이 한일합병 뒤 신문에 수원으로 쓴 다음 굳어진 것이다. 하지만, 화성에 살고 있는 다른 일행은 그것은 간단하게 결정할 일 아니라고 맞받는다.

일행은 자원봉사로 안내를 맡아준 문화해설사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다만, 문화해설이 전문용어 위주로 어렵게 진행된 것이 아쉽다는 말들을 한다. 좀 더 쉽게 그리고 감성적인 설명이었으면 하는 것이다.

a 용주사 대웅보전 처마의 풍경.

용주사 대웅보전 처마의 풍경. ⓒ 김영조

이후 점심식사 뒤 다음 답사지인 정조의 효성이 빚은 또 다른 장소, 용주사로 향했다. 용주사(龍珠寺)는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의 화산 기슭에는 있는데 정조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화산으로 옮긴 뒤, 1790년에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여기엔 절을 지을 때 정조가 보경스님을 시켜 만든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이 있다. 이 경은 부모가 자식을 잉태하여 낳고 기르기까지의 은혜와 그 은혜를 갚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불교경전으로 자식의 도리와 부모의 구실까지 생각해 보게 하는 효에 관한 경전이다.

오늘의 답사는 정조의 효성과 함께 한 일정이다. 덕원 선생은 "부모를 명당에 모시면 자손이 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손이 덕을 많이 쌓아야 부모를 모실 명당이 보인다"라는 말을 오늘도 강조한다. 일행 중 한 사람은 큰스님들이 세상을 보는 슬기로움을 지닌 것은 명당 속에서 마음을 비웠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봉수당 등 화성의 각 건축물에서도 보았던 단청은 이곳 용주사에선 더욱 아름답다. 눈을 뜨고 잔다는 물고기 형상이 걸려 있다. 물고기처럼 늘 깨어있으라는 이야기라던가? 처마 밑에는 속세의 찌든 때를 씻어주는 풍경소리가 청아하다. 나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이제 효도를 할 수도 없는 신세를 되돌아본다.

덧붙이는 글 | 화성연구회 : www.hwasong.org
용주사 : www.yongjoosa.or.kr
무예24기보존회 : www.muye24ki.or.kr

※ 이 기사는 시골아이고향, 대자보에도 송고됩니다.

덧붙이는 글 화성연구회 : www.hwasong.org
용주사 : www.yongjoosa.or.kr
무예24기보존회 : www.muye24k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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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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