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끼리의 약속'에 깨어진 유리구두

드디어 나도 시어머님과 동병상련을 ...

등록 2006.06.28 10:56수정 2006.06.29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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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무엇이든 우리집에는 세 개씩 존재 합니다. 마음을 담는 그릇조차도..

무엇이든 우리집에는 세 개씩 존재 합니다. 마음을 담는 그릇조차도.. ⓒ 양지혜

사람 사는 모습이란 게 아롱다롱 고만고만 하다던가요? 부자든 가난하든 나이가 많든 적든, 살아가는 속내야 같지 않겠습니까. 돌아보면 콩알 같은 보잘 것 없는 일이건만 마음 상한다고 소금기 찝찔한 눈물을 뽑고, 아이 재롱 한줌에 금세 세상의 온기를 다 담은 듯 살아가는 일상. 우리 집도 일곱 살이 된 늦둥이 아이를 두고 일희일비하는 철부지 엄마인 내 탓에 우당탕거리며 삽니다.


그저 '삶의 온기를 잃어버린 마음대신 아들의 어리광 하나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온기 넘치는 이불을 덮은 듯' 살고 싶다는 어느 시인의 넋두리처럼만 살기를 소망 하지만, 현실은 아이의 성장 변화를 따르느라 격랑(?)속을 헤매듯 삽니다.

그러던 지난 토요일 아침.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소리와 달그락거리며 부딪치는 그릇소리. 그 사이로 들리는 아이와 남편의 깨소금 같은 대화.

"엄마는 행복하겠지? 아빠하고 우용이가 이렇게 설거지 하니까."
"그럼, 엄마는 너무 행복해 할 거야."

남편과 아이의 소곤거림이 들리는가 싶더니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며, 아이는 엄마를 위해 자신이 설거지도 했고 커피도 탔다며 의기양양 자랑을 했습니다. "엄마, 엄마는 오늘 행복해야 돼. 엄마는 신데렐라 구두를 신은거야."

요즘 부쩍 말재주가 는 아이가 엄마를 순식간에 '신데렐라 공주'로 만들더니 '유리구두(?)'까지 신기는 마술을 부리곤 남편의 손을 잡고 산행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약속된 시간 동안만 달콤한 마술 속에 있어야 한다는 안타까운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아이는 알고 있었을까요? 아니, 나조차 그땐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마술은 영원하리라 착각 했으니까요. '야 이게 얼마만의 자유냐!' 이삿짐 정리와 아이의 다친 발로 인해 열흘간을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겪었던 터라 오랜만의 해방감과 여유는 더 달콤했습니다.

a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듯 했던 '엄마'의 자리. 하지만...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듯 했던 '엄마'의 자리. 하지만... ⓒ 양지혜

하지만 해방감이 소외감으로 바뀌고 '유리구두'의 마술은 너무 짧고 쉽게 풀린다는 진리를 확인하는 것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타다 준 커피를 채 다 마시기도 전에, 내게 자유와 해방감을 마술처럼 걸어두고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나갔던 아이가 잔뜩 풀 죽어 시무룩한 채 고개를 떨구고 현관으로 들어섰고, 남편은 다급하게 안방으로 '후다닥' 뛰어 가더군요. 순간, '신데렐라의 마술은 풀리고, 유리구두'는 벗겨졌습니다. '이걸 어째.'

그러나 안방에서 다시 나온 남편의 얼굴을 보면서 이젠 아예 입이 얼어붙었습니다. 남편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 말을 잃은 나를 대신해 남편은 나뭇가지에 찢긴 것이라며 치료를 부탁 했습니다. "아니 어쩌다가..."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 죄송해요. 우용이가 아빠를 나뭇가지로 때려서 아빠가 다쳤어요" 귓전을 때리는 아이의 울먹이는 말. 그리고 현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글썽이는 아이의 모습. 그 모두가 마치 아스라한 꿈속마냥 느껴지며,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멍'한 눈길로 남편을 쳐다봤습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일인가요? 남편이 빙그레 웃으며 내게 '찡긋' 눈짓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심하게 꾸짖을 것이란 내 예상과 달리 남편은 오히려 무릎을 꿇고 있던 아이를 달래는 것입니다. "우용아 이제 다시 안 그런다고 아빠랑 약속했지? 어서 가서 씻고 와" 남편은 아이를 욕실로 들여보내고서야 작은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내게 설명하기 시작 했습니다. "여보, 우리 아들 사내 중 사내놈이야. 저 녀석 무릎 꿇는 거 처음 봤지? 난 오늘 감동했어" 그렇게 시작한 남편의 얘긴 아이가 산행 중 길옆에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 들고 장난을 치다 그만 남편의 얼굴을 찔렀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채 "아빠. 잘못했습니다!"를 남편이 만류 할 때까지 고래고래 외치더랍니다.


a 세 개가 맞긴 한데…, 이제보니 뭔가 하나가 잘못 되었군요.

세 개가 맞긴 한데…, 이제보니 뭔가 하나가 잘못 되었군요. ⓒ 양지혜

세상에! 그러나 나는 남편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 불가능한 일곱 살 아이의 행동과 남편의 이해되지 않는 '흐뭇함'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덧붙이는 남편의 말은 이제 화까지 나게 하더군요. "당신 아들은 이제 다 컸어. 그러니 애 취급하지 마. 역시 저 녀석은 내 아들이야!" 그리고는 아이와 남자 대 남자로서 용서하기로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 한다며 오히려 나더러 괜히 나서서 아빠와 아들의 약속이 깨지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일을 그냥 넘길 수 없다고 하자, 이번엔 되레 남편이 더 화를 냅니다.

"남자끼리 약속한 거라잖아!" "아니, 남자끼리의 약속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을 다치게 했는데 그냥 넘긴다구요?" 그때 세수를 마치고 나오던 아이가 안 그래도 예민해진 내 신경을 건드렸습니다. "엄마, 우용이와 아빠는 비밀을 지키는 남자야. 그러니까 우용이가 잘못했으면 사과를 하는 거고 아빠가 용서해 주셨으니까 엄마는 가만히 있어야 돼. 아빠 그치?" '헉' 거듭되는 남편과 아이의 놀랍고 믿기지 않는 모습에 황당함과 알 수 없는 배신감, 그리고 허탈함이 해일처럼 몰려 왔습니다. 그리고 유리 구두를 신었던 신데렐라의 마술은 흔적조차 남김없이 풀려 버렸습니다.

주마등처럼 요 며칠간 남편과 아이의 일들이 눈앞에서 스쳤습니다. 근래 들어 부쩍 말끝마다 "엄마는 여자잖아!"라고 말대꾸를 하거나 어깃장 부리기 일쑤에, 사사건건 '싫어!'라는 말부터 앞세우던 청개구리 같은 아이의 행동. 그리고 제 딴엔 이제 컸다고 엄마와는 뽀뽀를 안 하겠다고 버티던 일. 그리고 무엇보다 걸핏하면 "난 아빠랑 남자끼리 말할 거야"란 소리를 해대던 아이 탓에 속을 끓였고, 그런 내 고자질을 듣고 아이를 나무란 후 남편의 얼굴에 번지던 얄궂은 미소. 그런데 남편은, 이젠 이마를 다쳐 피가 나는데도 혼을 내기는커녕 '남자끼리'란 말로 무마(?)를 넘어 부추김(?) 까지 하려고 하다니.


a 올망졸망, 알콩달콩한 마음들이 오롯이 모여 아름다운 삶을 엮어가고 싶습니다.

올망졸망, 알콩달콩한 마음들이 오롯이 모여 아름다운 삶을 엮어가고 싶습니다. ⓒ 양지혜

더구나 아이에게 자꾸 서운함이 들고 있는 이 못난 엄마 마음을 헤아리기나 하는지. 하던 일 다 뿌리치고 지 녀석 키운다고 하루만이라도 온전한 내 시간 좀 가지고 싶다는 소망도 져버린 채, 마음 졸이고 가슴 태우며 7년을 저만 짝사랑한 엄마의 마음을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 하다니. 훗날, 얼마나 더 많이 '남자끼리'를 외치며 나만 외톨이를 만들까 싶어 '안 봐도 비디오'란 생각에 남편과 아이에 대한 이런저런 지난 날들의 야속했던 일까지 겹쳐 부아가 솟구쳤습니다. 그리고 괜스레 눈물까지 찔끔 나오더군요.

품안의 자식이란 말도 있고, 아들은 자라면 아빠를 더 많이 이해하고 닮아가며 통한다더니 이렇게 일찍 내게도 배신(?)의 시간이 오다니. 정말 아이는 이제 엄마의 품을 떠나는 것인가요? 그렇게 마음을 볶고 있는 내 마음은 아랑곳없다는 듯 부자는 '남자들끼리'만 머리를 자르고 오겠다 다시 외출준비를 했습니다. "아니, 이마가 그런데 창피하게 어딜 가요?" 그러나 둘은 미리 약속을 한듯 ' 남자 미용실을 찾아야 돼!" 하더군요. 그리고 남편은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이마 얘기는 다시 꺼내지마! 난 우리 아들을 믿기로 했어!"

a 모든 '짝사랑'은 깨어진다지만, 그래도 짝사랑을 하렵니다.

모든 '짝사랑'은 깨어진다지만, 그래도 짝사랑을 하렵니다. ⓒ 양지혜

'쿵' 닫히는 현관문 소리가 마치 '남자들'만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동화속의 거울'처럼 느껴졌습니다. 갑자기 집안이 휑하니 적막감이 감돌더니 조금 전까지의 달콤했던 해방감의 어디로 가고, 사막 한가운데 혼자 있는 듯 외로움과 서글픔만 불쑥 솟았습니다. 그리곤 애써 잠재웠던 아이와 남편을 향한 소외감과 서운함만이 꾸역꾸역 밀려들었습니다.

'얄미운 녀석. 엄마 마음을 이렇게 헛헛하게 하려면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왜 신겼니? ' 혼자 덩그마니 거실 가운데에 앉아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어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숨만 내쉰다고 떠나간 내 짝사랑이 돌아올까요? 이젠 정말 다 자라서 엄마인 내 품을 벗어 난 것일까요? 앞으로도 얼마만큼이나 '짝사랑의 현실'에 서운해 하며 허전함을 달래야 할까요? 이젠 제 혼자 다 자란 듯 엄마 마음을 나 몰라라 하다니…. 마시다 남은 커피는 쓰기만 했습니다.

a 신데렐라의 마술은 화려하고 달콤하지만 결국은 깨어질 '꿈'이란 사실.

신데렐라의 마술은 화려하고 달콤하지만 결국은 깨어질 '꿈'이란 사실. ⓒ 양지혜

그때였습니다. "내가 네 시아버지보다 니 남편인 저 큰애를 장남이다 뭐다 하며 애지중지 키우고 믿고 살았는데 다 소용없다. 그리 키운 아들이 날 이렇게 서운하게 하다니. 너도 니 자식 낳고 살아보면 서운한 내 마음 알 꺼다." 시어머님은 자신의 아들이자 내 남편의 무심하고 살갑지 못한 행동을 내게 푸념 하시곤 했었건만 그 말이 왜 생각이 났는지요.

둥둥 몇 점 떠 있는 몽실한 구름사이로 쓸쓸한 시어머님의 얼굴이 보입니다. 드디어 고부간에 동병상련을 느끼게 된 걸까요? 내일은 아들로 인해 나보다 먼저 서운함을 가졌던 선배이신 시어머님께 문안 인사드리러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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