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요를 흔드는 바이올린 음반 한장

북한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 백고산 음반 출시

등록 2006.06.29 16:26수정 2006.06.29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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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백고산 바이올린 음반 표지

백고산 바이올린 음반 표지 ⓒ 신나라

나는 국악에 푹 빠진 사람이지만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서양 클래식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존경했던 국어선생님 댁을 방문했다가 처음 들었던 베토벤 교향곡 제5번의 기억은 언제나 나를 흥분시키곤 한다. 그것도 카라얀 등의 유명지휘자도 아니고, 유명 오케스트라도 아닌 에르네스트 앙세르메가 지휘한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였다. 하지만, 앙세르메는 그 뒤로도 내게 최고의 지휘자였다.

그런 나는 80년대 고급 명품은 아니지만 영국제 음향기기로 베토벤 5번 원판을 5장이나 비교해가며 들을 정도로 발전하기도 했다. 교향곡 이외에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비제의 ‘아를르의 여인 중 메뉴엣’ , 라벨의 ‘볼레로’,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따위도 언제나 나의 마음 속에 있다.


오케스트라 음악과 함께 파이프 오르간, 플루트, 오보에, 첼로, 바이올린 음악들은 가히 천상의 소리 아닐까? 지금도 나는 가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마단조를 즐겨 듣는다. 어떤 학생이 피아노 공부를 하다가 다른 곳에서 들리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소리에 홀려 선생님에게 혼났다는데 그 선생님도 제자를 나무라면서 바이올린 소리에 대해 한마디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그렇게 바이올린 소리는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면이 있다. 흐느끼듯 노래하고, 속삭이듯 소리를 토해내는 그 매력은 정말 아름다운 소리이다. 그 아름다운 바이올린 음악을 북한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백고산의 연주로 들을 기회가 마련됐다. 신나라(회장 김기순)가 시디 음반으로 내놓게 된 것이다.

1930년 평양에서 태어난 백고산은 바이올린 연주자이며, 제작자이기도 한 아버지 백명신의 영향으로 세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여섯 살 때 평양공회당에서 처음으로 독주회를 했는데, 이때 '아리랑', 슈베르트의 '소야곡' 따위로 큰 성공을 거뒀으며, 그 뒤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연주회에서도 많은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a 백고산이 어렸을 적 연주하는 모습

백고산이 어렸을 적 연주하는 모습 ⓒ 신나라

그런 그는 1951년 독일 베를린에서는 제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해 독주부문에서 3등을 차지했다. 백고산은 이를 계기로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악대학에 특별연구생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 당시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가이며, 차이코프스키 음악대학 교수 겸 모스크바 필하모니 수석 독주자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자청해서 지도를 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1957년 제1차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 콩쿨에 참가해 상을 받았으며, 평양으로 돌아와 공훈배우, 인민배우 칭호까지 받았다. 1960년대 들어 백고산은 연주가로 활발히 활동했고 무반주 '아리랑 변주곡', '고향길', '용광로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등의 바이올린 연주곡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수많은 유명 제자를 길러내기도 했다.


더구나 백고산은 1978년부터 세계 3대 콩쿨의 하나인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콩쿨의 바이올린 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심사위원 활동은 삶의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이는 일본이나 중국, 남한에서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백고산은 67살 되던 1997년 세상을 떠났고, 시신은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었다.

이번 음반은 일본 신세계 레코드사에서 보유하고 있던 북한의 음악 중 백고산 연주 음원을 재정리해서 발행한 것이다. 오픈 릴(open reel) 형태로 보관되어 있었던 터라 그 상태가 우려되는 형편이어서 이번 시디 음반으로의 출시는 그 의미가 크다.


이 음반 맨 앞에는 백고산이 작곡한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 - 아리랑 변주곡’이 실렸다. 이 곡은 우리 겨레라면 누구나 즐겨 부르고 사랑하는 '본조아리랑'을 기본 주제로 만든 변주곡이다. 이 작품엔 우리 겨레가 겪어온 고통과 슬픈 사연, 그리고 아리랑과 함께 흘러온 지난날의 고달픔과 처량함이 담겼다.

두번째 연주는 김길학 작곡의 바이올린 독주 ‘고향길’. 일본에서도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북한음악 특집 때마다 연주하는 많이 알려진 곡이다. 고향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한없는 애착과 끝없는 사랑의 감정을 담고 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고향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끌어내 주는 음악이다.

a 백고산이 작곡한 아리랑 악보

백고산이 작곡한 아리랑 악보 ⓒ 신나라

이밖에 백고산 작곡의 바이올린 독주 ‘민요를 주제로 한 소품’, 박민혁 작곡의 바이올린 독주 ‘환희’, 바이올린 독주 ‘고향마을’, 박민혁 작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굴진공(광산의 굴을 뚫는 노동자)’, 김린욱 작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용광로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등이 같이 수록되어 서정적인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 음반에는 북한 음악의 전문가인 재일조선예술연구소 리철우 소장의 상세한 배경설명과 친절한 음악해설이 곁들어 있어 음반을 듣는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이 음반을 듣고 있노라면 바이올린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금세 음악애호가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누가 공산주의를 말할 것인가? 통일은 이렇게 문화적 접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백고산의 ‘아리랑 변주곡’을 들으면서 한겨레임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신나라의 문화통일 노력에 큰 손뼉을 보낸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시골아이고향, 대자보에도 송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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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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