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자히르를 좇고 있는가

[서평]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

등록 2006.08.11 08:12수정 2006.08.11 08:12
0
원고료로 응원
문학동네
긴 시간 한 가지 대상으로부터 도망쳐본 적 있는가, 혹은 미쳐본 적 있는가. 돌이켜보면 즐거움보다 고통이 컸던, 즐거움마저도 벅차서 고통에 가까웠던 그 대상은 일일 수도, 사랑일 수도, 사물일 수도 있다.

파울로 코엘료의 2005년작 <오 자히르>는 사랑에 관한 또는 그것만큼 매혹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열망과 무지에 관한 소설이다. 우리는 열망할수록 평소의 이성적인 사고와 축적해둔 지식과 교양을 활용하는 데 서툴어지곤 한다. 마음을 뺏긴 이성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는 결국 얼굴을 붉히며 뒤돌아서고 마는 미숙함처럼. 그리고 열망에 익숙해질 때도 같은 현상이 야기되곤 한다.


에스테르는 '나'를 향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는 전쟁터의 종군기자로, 급기야 '나'가 알 수 없는 미지의 땅, 스텝으로 떠난다. '나'는 에스테르가 떠난 후에야 그녀가 자신의 '자히르'임을 깨닫고 긴 여정 끝에 사랑을 찾아감과 동시에 잃어버린 자아를 발견한다.

"아랍어로 자히르는, 눈에 보이며, 실제로 존재하고,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일단 그것과 접하게 되면 서서히 우리의 사고를 점령해나가 결국 다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어떤 사물 혹은 사람을 말한다. 그것은 신성일 수도, 광기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에겐 자히르가 존재한다. 그러나 자히르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순간 또는 자히르는 멀고 현실은 충족되었을 때 그 대상을 애써 외면하거나 잊어버린다. 작가가 말하듯, 언제까지고 불행해하면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치를 범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홀로일 때 둘을 꿈꾼다. 사랑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랑이 부재하는 자리를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러다가 마치 마술이 일어나듯, 사랑이 찾아오면 숱한 외로움의 나날에 종지부를 찍고 영원히 행복하리라 다짐하며 그 축복에 겨워 한다. 그러나 열망은 오래지 않아 구속에의 염증으로 변하곤 한다.

사랑은 집안에서 키우는 화초가 아니다. 정해진 날에 물을 주고, 때가 되면 가지치기를 해주고, 낮엔 창가에 두어 자연광을 쐬게 하는 등 기본적인 자연의 법칙을 지키면 아무런 저항 없이 온순히 성장하는 그것과는 다르다.

"들개는 용감하고 강인합니다. 암사슴은 부드럽고 직관적이며 우아합니다. 이 사냥꾼과 사냥감이 만납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게 되죠. 자연의 법칙에 따르자면, 한쪽이 다른 한쪽을 파괴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죠. 건설도 파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움직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자연의 법칙을 바꿉니다."


사랑(또는 자히르)은 실존이며 온전한 주체이다. 사랑은 한번 소유한다고 해서 영원히 소유되는 것이 아니며, 한번 만족했다고 하여 언제나 그 만족에 머물러있지 않는다. 사랑은 표현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며 사랑의 유지는 물질적인 풍요함이나 정신의 평온함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사랑은 오로지 그 자체를 위한 부단한 노력으로 유지된다. 그것은 자신의 자히르를 잊지 않음으로써만 가능하다. 가장 바보 같은 생각은 자신의 자히르를 포기하는 것이 사랑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신곡>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진실한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는 날, 잘 짜여있던 모든 것은 혼란에 빠지고 확고한 진실로 여겨졌던 것들은 모두 뒤흔들릴 것이다.'"

사랑은 고통이다. 그러나 떨쳐버릴 수 없는 매혹적인 고통이다. 내가 존재하는 것을 실감케하는, 덧없는 생을 가치있게 채우는 최고의 선물이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이면서 또한 삶이다. 길을 건너기 전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흔들어 보이던 대상이 길을 건너고 손을 잡은 뒤엔 그저 그렇게 느껴진다면 사랑이 식었다고 투정하지 말고 또다른 방법으로 그 사랑을 설레게 해라.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놓아버린 당신만의 자히르가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른다해도 용기를 갖고 그것을 되찾는 노력을 기울이기 바란다. 그것이 바로 '나'로서 살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나는 삼십 분 후에 내 연인을 만나러 나간다. 그와 나는 이틀 전 만신창이가 되도록 격렬한 다툼을 벌였다. 그 순간 우리가 나눴던 폭언과 사나운 눈빛은 여전히 가슴을 시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싫증내거나,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나에게, 나는 그에게 자히르이기 때문이다.

오 자히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문학동네, 2005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2. 2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3. 3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4. 4 한강 노벨상에 숟가락 얹는 보수, 그들에게 필요한 염치 한강 노벨상에 숟가락 얹는 보수, 그들에게 필요한 염치
  5. 5 윤 정부가 일선부대에 배포한 충격의 간행물 윤 정부가 일선부대에 배포한 충격의 간행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