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3회

등록 2006.08.31 08:12수정 2006.08.31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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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말입니까?"

추교학의 되물음에 정신을 차린 신태감이 수염도 나지 않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 버릇을 가진 것을 보니 그 역시 사내는 사내인 모양이었다.


"혈간은…."

신태감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말문을 닫았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일이었다. 비영조의 남은 인원 모두가 투입되었다고는 하나, 그리고 비영조의 조장 놈이 살아 돌아와 눈에 띠었다고는 하나 혈간이 죽었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잘못 전달된 종지로 인해 혈간을 공격했지만 만약 혈간이 죽임을 당했다면 지금 이 순간에는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그 종지는 실수나 위조된 것이 아닌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이루어졌을 명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사전에 알았더라면 분명 반대했을 일이었다.

"아니다…, 일단 확인부터 하고 말해주마."

어쩌면 추교학의 부친인 추산관이 한 명령일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지만 이 일은 특별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게 부모의 마음 아니던가?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물론 자신은 반대했겠지만 추산관이 고집을 피운다면 자신 역시 그대로 따랐을 것 아닌가? 계통을 무시하고 직접 명령을 내렸다면 정말 섭섭했다. 그는 추산관에게 확인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무당(武當)의 장문인인 청송자(靑松子)가 무당오검(武當五劍)까지 대동하고 이곳에 도착해 있다. 무당에서 발 벗고 나서겠다고 했으니 그리 걱정하지 말거라."


무당이라면 소림과 함께 무림을 이끌어 온 무림의 양대산맥. 이어온 전통과 비전절기로 보아 감히 어느 문파가 견줄 수 있을 텐가? 허나 추교학은 고개를 저었다.

"무당이 예전의 무당인지 아십니까? 현 무림에서는 무당을 빼고 공공연하게 오파일방(五派一幇)이라고 부르는 형편입니다. 무당은 차라리 무림 문파가 아니고 동창의 지부(支部)라 하면서 말입니다.”

사실이 그러했다. 무당에는 아직 동창에서 많은 인원을 파견해 간섭하는 입장이었다. 청정무구의 도장이었던 무당이 그러한 길로 빠지게 된 것은 영락제 말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처음에는 무당도사들의 양생법을 배우고, 도력(道力)이 높은 고인들을 모셔 국사에 조언을 듣고자 한 일이었지만 그로 인해 나라에서 무당에 지원하는 자금이 점차 많아졌고, 무당에 환관이나 황실 무인들이 드나들면서 그 성질이 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동창이 만들어지면서 무당과 동창 간의 관계가 밀접하게 연관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무당 장문인의 말을 무시할 문파가 어디 있더냐? 하여간 너는 몸가짐을 흩트리지 말고 지금까지 보인 그대로 행동하거라. 나머지는 모두 이 숙부에게 맡기고…."

"제가 뭐 한두 살 먹은 어린앤가요?"

"녀석…, 그리고…."

신태감을 잠시 말을 끊으며 묘한 눈빛으로 추교학을 바라보았다. 추교학은 그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는지 슬그머니 신태감의 시선을 피했다.

"어떻게 되어 가는 게냐?"

추교학은 여전히 시선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무엇 말이십니까?"

"몰라서 묻는 게야? 어디까지 진행된 거냐니까?"

신태감이 짐짓 야단치듯 말하자 추교학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특별히 어떻게 된 거는 없습니다. 이삼일에 한 번 정도는 운무소축(雲霧小築)에 들르기는 하지만 통 말을 건넬 수 있어야지요. 그저 차 한 잔 나누고 오곤 합니다."

"그래서 언제 잡으려고?"

답답하기는 추교학도 마찬가지였다. 찾아갈 때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가지만 막상 얼굴을 보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껴지는 것을 어쩌랴!

돌아오고 나면 한숨만 나오고, 어른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잠을 설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유독 자신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 모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추교학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을 하지 않자 신태감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슬(于瑟)이라 했느냐?"

추교학은 말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도대체 어떠한 처자(妻子)기에 그리 대하기 어려운고…? 그래…, 그 처자는 마음에 드는 사내라도 있는 것이냐?"

"없지요. 당연히 없습니다. 우슬 누님의 마음을 빼앗아갈 사내는 운중보 내에,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지요."

어찌 있을까? 그렇게 고결하고 성스러운 여자의 마음을 훔쳐갈 사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리라곤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한 마디 던져주면 그저 머리가 텅 비고 그녀의 옥음만 머릿속을 뱅뱅 돈다. 그녀가 탄식이라도 내쉬는 듯하면 세상이 온통 암흑이라도 된 듯 깜깜해지는 것을…. 언뜻 입가에 미소라도 스치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의 근심걱정은 저만큼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녀석…, 그런 마음을 갖고도 그녀를 얻지 못한단 말이냐? 아무리 그녀가 성녀(聖女)로 보여도 기껏 여자인 것을…."

그 말에 추교학은 일순 무섭게 신태감을 노려봤다.

"다른 것은 몰라도 숙부께서도 그런 말씀은 삼가십시오.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들을까 무섭습니다. 그녀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 말을 듣고 참지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허…, 녀석…. 그렇다고 노려 보기는…."

"휴우…, 소질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우슬 누님과 운중보의 후계 자리를 놓고 선택하라고 한다면 소질은 뒤도 안 돌아보고 우슬 누님을 택할 테니까요."

이미 우슬이란 처자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었다. 어디 출생인지 모르나 일곱 살에 운중보에 들어와 보주의 수양딸이 된 여인이었다. 이제 나이 스물둘. 과년한 나이였지만 아직 짝을 찾지 못했다. 아니 감히 짝이 될 남자가 없었다. 그 여인을 본 사람들의 태도는 언제나 같았다. 그렇다고 추교학까지 그녀에 대한 태도가 이러하니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신태감마저 궁금하기도 했다.

"운중보를 차지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녀도 너를 택하게 될 게다. 이 숙부가 반드시 네 양손에 네가 그토록 바라는 것을 쥐여주마."

신태감은 확신을 주듯 자신 있게 말했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난 듯 품속에서 한지(漢紙)에 싼 조그만 물체를 꺼내들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푸르면서 한지를 벗겨내자 손톱보다 큰 호박(琥珀)이 박혀있는 반지였다.

"이것은 네가 보관하고 있거라. 절대 남에게 보여주면 안 된다."

그 반지를 본 추교학이 둥근 눈을 더욱 동그랗게 떴다.

"이 반지는…?"

너무나 익숙한 반지였다. 이 반지의 주인을 추교학이 모를 리 없었다. 아니 운중보의 사람이라면 이 반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이상했다. 더구나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부친인 추산관태감의 손에도 가끔 끼워져 있던 반지와 같은 것이었다.

"어차피 언제고 네 것이 될 물건이었다. 자세한 연유는 묻지 말고 깊숙이 감추고 있거라. 일이 끝나고 나면 나중에 설명해 주마. 공연히 남들에게 보였다가는 의심을 사게 될 것이야."

굳이 신태감이 경고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만약 이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정말 의심을 받을 일이었다. 아니 문제가 분명 커질 터였다. 그것을 왜 자신에게 주는 것일까?

추교학은 반지를 들고 자세히 보았다. 호박에는 얼룩이 묻어 있는 것 같았는데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니 목단화(牧丹花) 세 송이가 피어 있는 듯한 문양이 들어있었다. 아마 솜씨가 좋은 도공이 호박을 그렇게 세공한 것 같았다.

추교학은 고개를 천천히 끄떡였다. 그의 손안에 든 그 반지는 죽은 철담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던 바로 그 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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