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평택지킴이 오기성씨 석방을 위한 탄원서 | | | | 재판장님, 안녕하세요.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이 한풀 꺾여,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렇게 세월은 사람이 가라 오라 하지 않아도 때를 알고 있습니다. 이곳 황새울에 있으면 계절이 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
귀 밝은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은 요즘 붉은 고추를 따서 볕에 말리고, 배추 모종을 텃밭에 심습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자연의 속삭임을 알지 못했던 저는 지금 처음으로 농민들의 심정을 배웁니다. 철조망 너머로 망가진 논을 바라보는 그이들의 아픔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곳에 멈추어 살고 있는 제 자신에 대해 생각합니다.
재판장님께 오기성씨의 탄원서를 쓰는 저는 다산인권센터라는 인권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오기성씨와 마찬가지로 국방부의 협의매수에 응하고 고향을 떠난 대추리 주민의 집을 치워서 살고 있는 평택지킴이입니다.
대추리로 주민등록을 이전해서 살지는 않지만, 이미 몇 달 동안 주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계절을 보냈습니다. 저처럼 대추리 도두리라는 생면부지의 공간에서 또 하나의 주민이 된 이들을 지킴이라고 합니다.
지킴이들은 어떤 언론들이 말하는 것처럼 붉은 띠와 쇠파이프로 무장한 외부세력도, 이념으로 무장한 빨갱이 집단의 구성원들도 아닙니다. 이들은 비정규직 노동자였고 사무직 노동자였고, 학생이고, 동화작가였던, 재판장님이 주변에서 흔히 보았던 그냥 보통 사람들입니다. 남다른 것이 있다면 심장의 두께가 너무 얇아서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는 바보같이 착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오늘 제가 석방의 탄원을 드리는 오기성씨에 대해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가 말없이 주민들의 농사일을 도왔고 결국은 마을을 떠나기 싫어서 주민등록을 이전하면서까지 주민이 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그가 보낸 편지를 보고 그가 '2000년까지만 해도 월드컵에 빠져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만 즐겁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그저 연봉을 어떻게 하면 올릴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는 지극히도 평범한 직장인'(오기성씨의 8월 9일 편지 중에서)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삶을 생각하게 되었고 좀 더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단체에 가입하게 되었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 모순을 만드는 중요한 당사자가 주한미군이며, 그들을 고발하지 않으면서 삶의 진정성을 실천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기성씨와 마찬가지로 지킴이로 이 땅을 찾은 이들은 자기가 아는 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모두 누군가의 딸이며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형입니다. 그런데 걱정하고 안쓰러워하는 가족들의 염려와 때로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볏단을 함께 옮기며 자기가 태어난 땅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죽고 싶다는 주민들의 절박한 소망을 실현시켜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난 5월 4일. 국방부는 '여명의 황새울'이라는 군사작전을 통해 조그만 마을의 논과 밭에 철조망을 치고 '군사시설보호구역'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마을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팽택 팽성읍 대추리 도두리 일대에 대한 군사시설보호구역 지정의 불법성을 다투는 소송이 진행 중인데도 눈 하나 껌뻑하지 않고 이곳 주민과 방문객들의 통행을 심각하게 제한했습니다.
설령 철조망 지역이 군사시설보호구역이라 하더라도 철조망 바깥에 주민들이 버젓이 살고 있는 마을을, 매일 수십 개 중대가 보초를 서며 이동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공권력에 의한 폭력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공무집행이라 하고 이를 막은 오기성씨에게 특수공무집행을 방해했다는 죄를 씌웠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주민들과 지킴이들은 경찰과 법이 국민의 편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오기성씨가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과 함께 저울 위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 저울이 개인의 신념과 양심의 자유를, 국가체제를 수호하는 권력의 무게와 동일하게 저울질할 줄 아는 공정한 저울이기를 바랍니다.
한 손에는 칼을 뽑아들고 한 손에는 저울을 든 법의 여신의 저울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보고 있는 재판장님이, 편파적이지 않도록 눈을 가린 그 여신이기를 소원합니다. 법집행을 의미하는 날카로운 칼날이 정의를 위해 쓰여졌음을 증명해 주기를 바랍니다. 민족과 진보를 위해 삶을 헌신한 한 청년의 진실한 실천이 재판장님을 통해 사회에 알려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