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에서 우는 아줌마를 만나다

[릴레이기고 ⑧] 내 안에 생생한 황새울

등록 2006.09.05 11:52수정 2006.09.11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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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있자, 그게 언제였더라? 황새울의 해돋이 본다고 빈 들 한가운데에 섰던 그때가….

지킴이가 된 사연을 풀어보라는 제안에,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떠올린 황새울. 일기를 뒤적거린다.

그때 그 이야기들

붉은 해. 펄럭거리던 노란 깃발. 황새울 하늘을 가로지르며 줄지어 날던 기러기떼.
이 모두를 안고 빈 들은 울고 있었고 그 안에서 한참을 질긴 바람 맞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손짓을 한다. 그렇게 만난 초록 털모자의 할아버지.

“추운데 왜 나왔어? 들 볼려구? 들 좋지? 근데 이 땅을 모두 전장터로 맹근다니! 원통해서 워째? 억울해서 가만 있지는 않는디….”

직접 메우고 일군 이 땅에서 수십 년간 농사지으며 살아오셨다는, 벌써 4년째 아침마다 들 한바퀴씩 도신다는 할아버지와 황새울 따라 걷다.

일기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할아버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초록 털모자가 떠올라 웃음이 난다.


평택에서는 오늘, 땅을 지키기 위한 이들과 빼앗으려는 거대한 힘 사이에서 (상황이) 급박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있다. 그 무지막지한 힘을 더불어 밀어내지 못하고 그저 모든 감각만 기울인 채 여기에 있다. 묵직한 마음에 아이들과도 하루가…….

그렇게 퇴근하는 길, 놀이터에서 꺼이꺼이 소리내며 우는 아주머니를 보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꺼이꺼이 우는 그에게 다가가 같이 울고 싶었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저 같이, 어깨 토닥이며 등 쓸어내리며 말이다. 하지만 오물거리는 내 울음을 그이의 울음소리에 실어보내며 집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만난 연수, 지영이랑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일명 대추리 모험! 사진기 셔터를 누를 때마다 마음에 담고 있던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아이들 눈에 비친 어른들과 대추리는 무릎을 딱 치게 만들었다. 연수랑 지영이의 고 작은 입에서 나오는 초록과 생명, 위로와 믿음. 어디서든 언제든 아이들은 희망이고 힘이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놀이방에서의 한때, 촛불집회 정경, 평화걷기/평화캠프에서의 땀내음…. 한번 들추기 시작한 일기는, 대추리에서의 일들로 생생하다. 그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싶은 것이, 한 땀 한 땀 움직임 같이 엮어나간 여럿이 떠오른다.

그렇게, 어느새, 대추리는 지켜야 할 우리의 고향이 되고 이곳의 평화는 곧 우리의 평화가 되었구나 싶은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이 뜨거움이 나를, 내가 아는 또다른 공간의 사람들에게 ‘나는 평택 평화 지킴이’라고 소개하게 만든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대추리, 도두리에서 살지 않는다. 사실, 마을에 살지 않으면서 지킴이라고 하는 것이 좀 미안하다. 지난 5월 행정대집행 때 일터에 있던 나는 처음으로 ‘일을 그만 둘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까지 하긴 했지만, 일을 그만 두지 않는 한, 앞으로의 싸움에서도 - 마음과 달리 그때처럼 - 당장 달려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먹먹해지며 ‘평화 지킴이’라는 호칭에, 심지어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에 더욱 미안해진다.

하지만 일단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메워볼까 한다. 월요일 아침이면 주말 동안의 평택 안부를 묻고, 읽을거리 건네면 꼼꼼하게 읽어보는 동료들과 평택 평화 씨앗을 나누려 한다.

평택 이야기 전해 듣고 “대통령 아저씨, 그렇게 살면 빨리 늙어요”라고 말하는, “대통령 아저씨의 소중한 것을 가지고 가면 정말 짜증나고 슬프고 마음이 아프겠죠? 대추리 사람들에게 황새울을 빼앗아 간다는 것은 대통령 아저씨의 소중한 것을 누군가가 빼앗아 간다는 것과 같은 거예요. 모두의 인권은 똑같은데 왜 대통령 아저씨라고 아저씨 말만 들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동무들과 평택 평화의 싹을 틔우려 한다.

그래, 나 같은 지킴이도 필요하지 않겠어

내 어깨를 내가 다독여본다. 토닥이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빈 들이면서 빈 들이 아니던 그때의 황새울이 내 안에 생생하다. 야만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파헤쳐졌어도 눈부신 초록 머금고 있는 황새울을 떠올린다.

보기만 해도 가슴을 아리는 철조망 옆에서, 멈추지 않고 조금씩, 하지만 힘차게 일구고 있는 이들의 마음으로, 나도 조금씩, 하지만 멈추지 않고 평택 평화의 씨앗을 나누고 싹을 틔울 것이다. 나는 평택 평화지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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