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리로 들어가는 길은 자유롭지 않다.김준호
저는 이곳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작업을 한다기보다는 조금씩 배워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네요. 이곳에서 상주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주 오게 된 것은 같은 사무실의 일건형의 작업을 돕기 위해서 4월 즈음부터입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고립된 상황도 아니었고, 건답직파로 영농작업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표정도 어둡지만은 않았고 동네가 활기차 보였습니다. 하지만 5월 4일 이 후 대추리와 도두리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은 왠지 모를 미안함에 쳐다볼 수도 없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그때의 상황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4일 새벽부터 울렸던 마을 사이렌과 곧이어 미군부대 안쪽에서 저 멀리까지 줄줄이 이어지던 전경버스, 그리고 바깥 경계로 해서 행렬을 지어 부산하게 뛰어가던 학생과 노동자들, 그 사이로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사진기자들과 카메라로 촬영하던 방송국 사람들까지. 곧이어 마을 입구를 막고 있던 사람들과 그 저지선을 뚫고 들어오려는 전경들이 충돌했고, 그 이후 저는 카메라를 계속 켠 채로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녔습니다.
5월 4일 저는 대추리에 있었습니다. 그때 정부는 '여명의 황새울'이라는 군경 합동작전으로 평택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여 이곳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을 토끼몰이식으로 연행했고, 끝내는 주민들과 지킴이들의 터전이었고 투쟁의 중심이었던 대추 초등학교를 무자비하게 무너뜨리고, 볍씨를 뿌려놓은 논 위에 군사작전처럼 철조망을 빙 둘러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