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선생님 덕분에 먹고 살제"

[섬이야기45] 진도 의신면 굴포 포구이야기

등록 2006.09.08 14:37수정 2006.09.0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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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섬마을은 작은 논배미도 트랙터가 아니면 가을걷이가 어려울 만큼 일손이 없다.

섬마을은 작은 논배미도 트랙터가 아니면 가을걷이가 어려울 만큼 일손이 없다. ⓒ 김준


a 진도군 임회면 굴포포구

진도군 임회면 굴포포구 ⓒ 김준


진도의 곳곳에서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섬마을 주민들은 바다 농사를 시작한다. 갯마을 사람들의 일 년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셈이다. 고막 양식을 하는 마을, 굴 양식을 하는 마을, 김 양식을 하는 마을 다양하다.

바다도 개인이 이용하는 경우, 몇 명이 힘을 합해 하는 경우, 마을주민들이 나름대로 규칙을 정해 나누어 이용하는 경우 등으로 다양하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기업 규모로 바다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파란 바다 빛에 어울려 누런색을 자랑하던 나락이 콤바인이 지나가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옆에는 아직도 여물려면 가을볕을 더 견뎌야 하는 벼들이 얼마 남지 않는 시간을 아는지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다. 바닷가에 작은 논에도 트랙터가 작업을 한다. 예전 같으면 낫을 이용해 손으로 벼를 벴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사람이 없다. 작은 논도 트랙터가 아니면 농사짓기 어렵다. 벼를 심고, 수확을 하는 것 모두 기계가 아니면 묵혀야 한다. 아주머니 한 분이 임회면 백동리 18번 국도에 갓 수확한 나락을 널고 있다. 멀리 굴포 포구에 작은 물비늘이 바다가 있음을 알려준다.

정월 보름이면 고산의 은덕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a 배중손 장군 사당에서 본 굴포포구

배중손 장군 사당에서 본 굴포포구 ⓒ 김준


a 고산 윤선도가 막았다는 간척지(백동마을)에서 바라본 굴포포구

고산 윤선도가 막았다는 간척지(백동마을)에서 바라본 굴포포구 ⓒ 김준


굴포 포구를 둘러싸고 상굴포, 하굴포, 남선, 백동, 신동, 짝벌 등 여러 개의 마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곳 주민들은 400∼500여년 전에는 모두 갯것에 기대어 찬거리를 구하고, 산에서 나무를 해서 팔거나 숯을 구웠을 것이다. 이들 마을이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400여년 전이다.

고산 선생님이 양지머리(굴포)와 짝벌을 연결하는 원을 막아 100만여 평의 농토를 조성하면서 이곳 마을주민들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주민들 중 조선시대 권문세가들이 토지를 확대하는 방법 중 대표적인 것이 간척이었다. 16세기 인구가 증가하고, 장시를 기반으로 한 유통질서가 형성되면서 곡물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에 평민, 사대부, 국가 등 다양한 계층에서 간척사업을 추진하였다.


16세기 해남에 근거를 둔 고산(1587∼1697)의 가문은 해남, 진도, 완도 지역에 입안(立案·관에서 개인에게 간척을 허가하는 문서)을 받아서 간척사업을 전개했다. 이 시기에 간척이 가능했던 것은 염분기가 있는 토지에서 재배할 수 있는 벼 품종이 도입되었다는 것과, 개간에 성공하면 주인이 없는 땅이기 때문에 쉽게 양안(量案·토지대장)에 올릴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조세부담이 가볍다는 점 등 때문이다. 아마도 고산이 굴포에 농지를 조성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와 맥락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굴포처럼 포구의 입구가 좁고 안쪽에 수심이 낮고 갯벌이 발달해 있는 지역은 간척에 적합한 장소였다. 당시 고산은 지금의 제방(도로)보다 100여m 앞쪽에 쩍벌과 양지머리(굴포)를 연결하였다. 둑을 쌓는 일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둑을 쌓으면 터지고 쌓으면 터지고 하자 고산은 깊은 시름에 빠져있는데 하루는 꿈속에서 엄청나게 큰 구렁이가 원둑을 기어가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제방에 가보니 구렁이가 기어간 흔적 같은 것이 있어 그곳으로 석축을 쌓아 원을 막았다더니 무너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남해의 간척의 선구적 역할을 한 고산은 굴포만이 아니라 노화읍에도 100만여 평의 간척지를 조성했다고 한다. 지금도 굴포 주민들은 정월 보름이면 고산의 은덕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a 굴포 포구에 있는 배중손 장군 동상

굴포 포구에 있는 배중손 장군 동상 ⓒ 김준

고산이 막았다는 굴포리 원둑 위에 바다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쥔 갑옷을 입은 장군상이 있다. 그 주인공은 대몽항쟁의 주인공 배중손이다. 몽고에 항복한 고려정부가 1270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자 배중손 장군은 강화도를 떠나 70여일 만에 진도 용장사에 도착해 진지를 구축했다. 용장사는 제주도와 연결되는 중요한 포구 벽파진과 접해 있으면서 뒤쪽에 둘러싸인 산이 성을 이뤄 천하의 요새였다.

그러나 몽골연합군의 전술에 속아 성이 함락되었다. 배중손 장군도 몸을 피해 제주로 가기 위해 나서던 중 굴포에서 격전을 벌이다 전사했다고 전한다. 최근 배씨 문중에서 이곳에 동상을 세우고 사당을 지어 모셨다. 그 사당 옆에는 고산 선생의 사적비도 세워져 있다. 굴포 포구는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의례 공간에 고산 선생의 사적비 그리고 배중손 장군의 사당이 공존하고 있다.

"바다 덕에 '개안하다'"

a 굴포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는 어민

굴포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는 어민 ⓒ 김준


a 삶아서 나물처럼 요리해서 먹는 '꼬시래기'

삶아서 나물처럼 요리해서 먹는 '꼬시래기' ⓒ 김준


굴포만의 포구는 크지 않지만 자갈, 모래, 갯벌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이러한 생태환경 탓에 낙지, 바지락, 굴, 꼬시래기 등 다양한 갯벌생물들을 만날 수 있다.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반찬거리인 셈이다. 특히 꼬시래기는 데쳐서 무쳐먹은 해초로 자갈이나 조개껍데기에 붙어서 자라는데 갯바닥에 있을 때는 긴 머리카락처럼 보이며 서해와 남해 갯벌에서 서식한다.

아직 굴을 먹기는 이른데도 멀리 송정에서 걸어서 왔다는 할머니는 점심을 싸 가지고 와서 굴을 까고 있다. 의신면에 속하는 송정마을은 젊은 장정들 걸음으로도 한참을 가야 하는 거리이다. 진도는 소포만을 비롯해 덕병갯벌 등 크고 작은 갯벌들이 막아지면서 죽림, 굴포, 접도 등 일부 지역에만 갯벌이 남아 있다.

이곳 굴포갯벌은 안쪽으로 깊숙이 만입된 곳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물이 들면 호수와 같지만 서해와 달리 배를 타고 2∼3분만 나가면 큰 바다와 접해 있어 전복을 비롯해 장어, 능성어, 문어 등 좋은 어장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굴포리를 중심으로 낭장을 이용해 댓집이 멸치를 잡고 있으며, 장어와 문어통발, 김 양식 등으로 생업을 삼고 있다. 한때 굴포리에서 김 양식을 해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이씨(66세)부부, 지금은 둘이서 일할 정도로 작은 통발을 하고 있다. 막 '물'(통발이나 그물에 고기가 들어 있나 확인하는 것)을 보고 배에서 내리는 이씨와 포구에 앉아서 나누었던 이야기 중에 기억에 남는 말이다.

"지금은 마음이 개안하요. 지기들 벌어서 지기 먹고, 나 벌어서 나 먹고, 주라고 해도 줄 것도 없소."

마음이 개안하다는 말은 '홀가분하다' 쯤으로 표현하면 될까, 어쨌든 모두 장성해서 짝을 이루었고, 이렇게 매일 바다에 나가서 많지는 않지만 생활할 수 있어 좋다는 것이다. 이 모두 바다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이씨도 꽤 넓은 논을 가지고 있지만 벌이를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 그래도 통발 4줄 넣어서 장어 잡고, 문어 잡아 그럭저럭 가용도 쓰고, 손주들 용돈도 주고 있다. 게다가 자식들이 명절이라고 집에라도 오는 날이면 갯것들을 내놓을 수 있다.

이씨의 표현대로 바다가 있어 '개안하다'는 말이 어울린다. 뿐만 아니라 굴포에서는 아직도 자연산 전복을 따고 있다. 작업은 완도에 있는 제주출신 잠녀들이 맡고 있다. 옛날에 비해서 그 양이 많이 줄었고, 양식전복에 밀려 찾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자연산 전복 맛을 본 사람들은 꼭 찾는다고 한다.

중만리에서 최근까지 물질을 했던 제주출신 잠녀 최씨 할머니(66)는 직접 어장을 사서 자연산 전복을 따기도 했다. 45년 전 할머니가 이곳에 시집왔을 때 진도 사람들은 전복을 먹을 줄 몰랐다고 한다. 겨우 삶아서 말렸다가 먹는 정도였고, 생으로 전복을 먹는 것은 보기 어려웠다고 한다.

갑자기 갈매기가 머리 위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모래가 많이 섞인 자갈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던 주민들이 주섬주섬 챙기더니 밖으로 이동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물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여름 소나기에 만들어진 거품들이 빗물에 밀려 내려오듯 밀물에 작은 포말들이 소리 없이 다가와 있었다.

갈매기들이 먼저 알고 들어오는 먹이를 찾아 비행을 시작한 것이다. 주민들은 갈매기 소리에 밀물을 직감하고 이동할 채비를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몇 시에 물이 들고나는지 조석표를 볼 필요가 없다. 무릎까지 들어가는 갯벌에서 낙지를 잡던 주민들은 벌써 나와 졸졸 흐르는 민물에 씻고 있다.

a 굴포 갯벌에서 바지락 캐고 굴을 까는 주민들

굴포 갯벌에서 바지락 캐고 굴을 까는 주민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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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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