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시 은빛 가을이 왔다

경남 마산 곡안리 마을과 창녕 화왕산 억새밭에 가다

등록 2006.10.05 17:12수정 2006.10.05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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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노닥노닥하는 억새 물결 따라 은빛 가을이 피어나고 있다.
바람과 노닥노닥하는 억새 물결 따라 은빛 가을이 피어나고 있다.김연옥

나는 지난 3일 동요를 부르는 '철부지' 선생님들을 따라 경상남도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마을에 갔다. 그날 낮 12시 곡안리 마을회관 옆 숲에서 특별한 위안 잔치가 벌어진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곡안리 숲에서 알게 된 슬픈 이야기


한가위를 맞이하여 열린사회 희망연대가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에 일어났던 곡안리 사건의 피해자와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뜻있는 잔치였다. 아울러 그들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곡안리 사건의 진실 규명을 위한 신청서를 올 11월 말까지로 되어 있는 접수 기간 안에 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행사이기도 했다.

'철부지' 선생님들의 노래가 곡안리 주민들의 한을 씻어 내듯 곡안리 숲에 울려 퍼졌다.
'철부지' 선생님들의 노래가 곡안리 주민들의 한을 씻어 내듯 곡안리 숲에 울려 퍼졌다.김연옥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8월 11일. 그날 하루 동안 미군의 난데없는 무차별 사격으로 성주 이씨 재실에 피신해 있던 노인,어린이,부녀자 등 곡안리 주민 83명이 영문도 모른 채 희생되었다 한다.

더군다나 참혹했던 학살의 피해자와 유족들은 그 엄청난 일을 당해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도리어 그동안 숨죽이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 통한의 세월이 벌써 50여년이 흘렀으니, 곡안리 주민들의 가슴속에는 얼마나 억울함과 울분이 응어리져 있을까.

한 맺힌 곡안리 사건을 모른다면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곡안리 숲에는 그날 흥겨운 풍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민들은 정갈하게 차려 놓은 뷔페 음식을 먹으며 편안하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철부지' 선생님들이 섬집 아기,오빠 생각,울고 넘는 박달재 등을 부를 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도 손뼉을 치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는 곡안리 주민들의 오랜 한이 꼭 풀리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우리 일행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콩이 엄마라고 부르는 친구와 단둘이서 억새를 보러 바로 창녕 화왕산(756.6m, 경남 창녕군 창녕읍)으로 향했다.


창녕 화왕산에서 은빛 가을을 보다

콩이 엄마는 유기견 콩이 때문에 나와 더욱 가까워진 사이이다. 지난해 여름, 비가 많이 오던 날에 우연히 직장 앞에서 그 강아지를 발견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여름 내내 돌보며 정성을 쏟았던 적이 있었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 콩이 엄마의 시댁에서 잘 자라고 있는데, 늘 내 마음 한 자락에는 콩이가 머물러 있다.


우리는 오후 3시께 화왕산 군립공원 자하곡 매표소를 거쳐 화왕산 산행을 시작했다. 옛날 화산 활동이 활발하여 불뫼, 큰불뫼로 부르기도 했다는 화왕산. 이번이 세 번째 산행이라 낯익은 길이었다. 산행 출발 시간이 늦은데다 은빛 억새로 뒤덮여 있는 십리평원이 보고 싶어 서둘러 올라갔다.

길이 가팔라 이름 한번 고약하게 붙여진 환장고개도 그날은 왠지 힘들지 않았다. 아마 거기에 소박한 모습으로 피어 있던 연보랏빛 쑥부쟁이꽃들의 환한 웃음 때문인 것 같다.

눈부신 가을 햇빛에 은가루 날리듯 억새꽃이 반짝이고 있다.
눈부신 가을 햇빛에 은가루 날리듯 억새꽃이 반짝이고 있다.김연옥

김연옥

환장고개를 넘어서자 은빛 억새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햇살 아래 굼실굼실 흔들리는 억새 물결 따라 가을이 졸린 듯 누워 있었다. 나는 억새가 흐드러진 길을 따라 걸어가다 가슴속에 묻어 둔 애틋한 사랑 이야기라도 듣고 싶어 억새풀 옆에 살며시 앉았다.

굼실굼실 흔들리는 억새 물결 따라 가을이 졸린 듯 누워 있다.
굼실굼실 흔들리는 억새 물결 따라 가을이 졸린 듯 누워 있다.김연옥

묻어 둔 애틋한 사랑 이야기라도 듣고 싶어 나는 억새풀 옆에 살며시 앉았다.
묻어 둔 애틋한 사랑 이야기라도 듣고 싶어 나는 억새풀 옆에 살며시 앉았다.김연옥

화왕산 정상에 이른 시간이 4시 30분께. 5만6천여 평에 이르는 화왕산 억새밭은 아직 억새꽃이 다 피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날 개천절이라 어린이들과 함께 가족 단위로 산행 나들이를 나선 등산객들이 많았다. 그리고 눈부신 가을 햇빛에 은가루 날리듯 반짝이는 억새꽃 따라 다정하게 손잡고 걸어가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도 참 예뻤다.

창녕 화왕산 정상.
창녕 화왕산 정상.김연옥

나는 바람과 노닥노닥하는 억새 물결 따라 흰빛 가을이 피어나는 그곳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하얀 억새꽃이 피어나는 내 마음밭은 이제야 진정 가을이었다.

구름은 비를 쏟았다
날짜들이 흘러가고
사과나무는 여기저기 사과를 쏟고
마른 나뭇잎 속에서 늙은 거미는
연약하게 댕댕거린다

햇빛이 오래 앉았다 간 자리
바람이 오래 만지작거린 하늘

새들이 날아간다
빈 하늘이 날아가버리지 못하게
매달아놓은 추처럼.
-황인숙의 '다시 가을'


화왕산 억새꽃은 여기저기 가을을 쏟고 있었다. 그곳 억새 평원에 오기 전에는 가을을 입으로만 노래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내게 다시 가을이 왔다!

나는 콩이 엄마와 5시가 넘어서야 하산을 했다. 빨간 저녁 해가 서서히 넘어가며 온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우리는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녹차 수제비를 한 그릇씩 먹었다. 콩이 이야기도 하면서. 그리고 벌써 어둑한 밤길을 헤드라이트로 밝히며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하산길에 다정하게 걸어가던 젊은 연인의 모습이 참 예뻤다.
하산길에 다정하게 걸어가던 젊은 연인의 모습이 참 예뻤다.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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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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