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48회

등록 2006.10.12 08:06수정 2006.10.12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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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두는 지저분한 취미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되는군."


함곡은 풍철한을 보며 말을 하다가 시선을 경후 쪽으로 돌렸다.

"그렇지 않소?"

경후의 얼굴이 굳어 들었다. 역시 함곡이란 인물은 괜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서교민의 방안에서 모든 것을 파악했고,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경후는 감추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소. 홍교란 시녀를 농락했소."

"농락했다고는 하나 교접은 하지 않았을 거요."


그게 무에 그리 중요한 일일까? 하지만 집요한 함곡의 말에 경후는 고개를 끄떡였다. 함곡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풍철한을 힐끗 보더니 그 옆에 서 있는 좌등을 보고 물었다.

"좌대협. 홍교란 아이는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일 것 같은데…."


"그렇소. 이번 보주의 회갑을 준비하면서 삼 개월 전에 이십여 명의 아이들을 새로 데려왔는데 그 중 한 아이요."

대답하는 좌등의 얼굴에 일말의 의혹과 기대가 섞였다. 의혹은 그러한 일까지 추론하는 함곡에 대한 감탄이 섞인 의혹이었고, 기대는 그런 것까지 짐작했다면 이미 뭔가 감을 잡은 함곡이 이 사건을 해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 생각해 봅시다. 서당두는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저녁을 먹지 않고 차를 시켰소. 그리고 차를 가지고 들어온 시비를 희롱했고, 그 아이의 은밀한 고의가 찢겨 뜻밖에도 그의 입에 틀어박혀 있었소."

그의 시선이 능효봉의 얼굴에 머물렀다. 무슨 의미였을까? 하지만 곧 그의 시선은 풍철한에게 향했다.

"그러면 입에 틀어박혀 있는 고의 말고 찢겨 나간 나머지 부분은 어디 갔을까? 흉수가 서당두의 고함이나 비명소리를 막기 위해 사용했다면 아예 고의를 통째로 입에 틀어막는 것이 나았을 텐데…."

"그렇다면 자네는 그 고의의 나머지 부분이 어디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침상 주위나 밑에는 없었네."

좌등과 경후의 얼굴에 의혹이 이는 것을 본 풍철한이 함곡과 장단을 맞추듯 물었다. 함곡이 그 질문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함곡은 풍철한을 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풍철한은 인정할만한 친구였다.

"자네도 알면서 굳이 내 입으로 대답을 듣고자 하는군."

"그래야 다른 사람들에게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좋으이. 우리같이 말해보기로 하세."

말과 함께 함곡이 한 호흡을 뗀 후 고개를 끄떡이자 함곡과 풍철한의 입에서 동시에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바로 서당두의 뱃속!"

함곡과 풍철한이 빙긋이 웃었다. 그들의 태도를 보면 마치 장난하듯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굳이 풍철한이 묻고 함곡이 대답하는 것은 그 두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방법 같았다. 풍철한이 다시 물었다.

"그럼 흉수가 그에게 홍교란 시녀의 고의를 먹였단 말인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네. 고의를 먹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먹이지는 않았네. 서당두 자신이 살기 위해 먹은 것이네. 공포에 질려 자신의 정액이 묻어 있는 고의를 뜯어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그렇다면 흉수는 무엇 때문에 고의를 먹였단 말인가?"

"그것이 사실 이해되지 않는 일일세. 서당두에게 고의를 먹여야 할 정도로 앙갚음을 할 사람은 희롱을 당한 홍교란 시녀뿐이네. 아니면 그런 더러운 짓을 본 흉수라면 서당두에게 그런 짓을 시킬 수도 있네."

"자네의 말은 조금 이상하군. 그럼 흉수는 이미 서당두가 시녀를 욕보일 것이라 생각했단 말인가?"

계속 질문하는 풍철한의 태도로 보아서는 무척이나 궁금한 듯 보였지만 그의 표정을 보면 전혀 그런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미 함곡의 그러한 대답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했으며, 그 말을 이끌어 내기 위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서당두를 죽인 흉수는 두 사람이네. 아니 죽인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서당두를 죽일 때 이 방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고 해야 정확하겠군. 한 사람은 방문으로 들어왔고, 한 사람은 창문으로 들어왔네. 또 나갈 때에도 방문으로 들어온 사람이 방문으로 나갔고, 창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창문으로 나갔네."

"자네가 그걸 어찌 아는가?"

"당연하지 않은가? 방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당연히 방문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하네.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받지 않고 들어올 수 있었던 사람이란 말이네. 또 창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당연히 방문으로 들어오면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이니 창문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풍철한은 기대에 섞인 질문을 했다가 함곡의 그저 정황에 따른 추론을 듣자 피식 웃었다.

"그럼 서당두에게 고의를 먹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 공포의 존재는 무엇인가? 단지 서당두를 죽인다고 위협해서 먹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미 서당두는 마혈을 짚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네. 그런 상태에서 그는 곤욕을 치르게 되었지. 침실에서 말일세. 흉수는 서당두가 들고 있던 고의를 찢어 조금씩 그의 입에 넣었네. 숨이 막힐 것 같으니까 할 수 없이 삼켜야 했지. 죽음의 공포가 서당두를 다른 어떠한 생각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걸세."

"그렇다면 흉수는 서당두에게서 캐낼 뭔가가 있었던 모양이군."

"그랬다고 보아야겠지. 하여간 죽을 때쯤 되어 탁자 근처로 온 것이네. 아니 침실에서 흉수는 이미 손을 쓴 다음에 그를 옮겨 탁자 의자에 앉힌 것이네. 하지만 서서히 질식해 죽어가면서 그의 몸은 의자에 앉지를 못하고 미끄러져 내린 것이지."

"그럼 함곡선생께서는 서당두가 독룡아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질식해서 죽었다고 생각하시는 거외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경후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서당두는 동창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비밀을 누설했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럴 것이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목에 걸려 있었던 고의 조각을 삼키려고 애쓰다 삼키지 못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서서히 질식하여 의식을 잃을 때쯤 독룡아의 흔적을 남긴 것이라 생각되오."

"왜…, 오히려 숨겨야 할 독룡아의 흔적을 남긴단 말이오?"

"그것이 아마 서당두를 죽여야 할 이유를 밝혀내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거요. 간단히 생각하면 아마 서당두에게서 알아내야 할 비밀이 너무나 중요해서 흉수는 독룡아로 시선을 끌고자 했을 거요. 독룡아가 나타난 것이 알려지게 되면 누구나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조사를 하게 될 것이고, 흉수가 서당두를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는 너무나 사소한 문제로 쉽게 묻힐 수 있을 테니 말이오."

"그렇다면 함곡선생께서는 흉수가 서당두를 죽여야 할 이유를 알고 있단 말씀이시오?"

경후의 다급한 질문에 함곡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짐작 가는 바는 있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소. 하지만 곧 알게 될 것 같소."

그러더니 함곡은 좌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살인사건은 계속 일어나게 될 것 같소. 좌대협께서 매우 피곤하시겠지만 운중보에 머물고 있는 모든 분들의 신상내력을 내일 오전까지 알려주시오.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좋지만 감추어야 할 내용이라면 이름 정도만으로 족하오."

"본 보의 인원 전부를 말함이오? 아니면 이곳에 온 손님들까지 포함하는 것이오?"

"모두 포함해서요. 가정이나 시비들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알려주시오. 또 하나…, 그들이 머무는 곳은 반드시 표시되어야 하오."

함곡은 왼손에 들고 있는 봉비(鳳匕)를 의식적으로 흔들고 있었다. 그것은 용봉쌍비의 이름으로 명령을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알겠소. 헌데 앞으로 살인사건이 계속 일어날 것이란 선생의 말씀은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이곳 어딘가에서는 살인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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