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따라 사진은 몇차례 바뀌었지만, 흑백 사진 두 장은 언제나 액자속에. 나와 형제들은 이 두장의 사진과 무언가를 읽고 계신 아버지 모습을 매일 보고 자랐다(친정 안방에 걸려있는 액자, 지난 8월 휴가 때 찍은 사진).김현자
올해 76(1931년생)세인 친정아버지는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다. 6·25 전쟁 전, 공산당에 맞서 싸우기로 명성 높았던 백호대(백두산호랑이) 게릴라였다. 1950년 11월, 아버지는 당시 북한에서 공산당에 맞섰던 사람들이 남한으로 내려오는, 역사에도 기록된 그 첫배에 몸을 싣고 월남했다.
그후, 특공대였던 아버지는 7년간의 군 생활 끝에 제대했지만, 혈혈단신의 몸으로 가진 기반이 없다보니 고생이 무척 심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농사철이 아닌 겨울에는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서 한 달 넘도록 머물면서 막노동을 하시곤 했다. 봇짐을 메고 '나이롱 양말'이나 숯장사 등을 하면서 며칠만에 한번 씩 집에 오실 때도 많았다.
난 아버지가 돌아오실 날을 언제나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먹을 것도 많이 사오셨지만, 그와 함께 항상 새로운 책들을 가져오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가져 온 책들은 주로 동·식물 도감이나 지도책, 역사책도 있었고 관광지 홍보 책자도 있었다. '읽을 것'에 대한 욕심이 많은 아버지는 관광을 가면 가장 두꺼운 관광책자를 사와 닳도록 읽으셨다
열 살 남짓 때의 기억이다. 아버지가 가져온 책 중에 제주도에 관한 것이 있었다. 물허벅이나 해녀, 한라산 중턱에 뛰노는 말, 돌하루방과 낮은 돌담 너머 넘실대는 파도 등이 얼마나 신기하던지. 안보고도 설명들을 술술 말할 수 있을 만큼 읽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까지 그 풍경들은 꿈속에 나타나곤 했다(아버지는 아직도 그 책을 갖고 계신다).
또 동·식물 도감 같은 책을 통해서는 날마다 수많은 생물들의 신기함에 빠져들었다. 뒷간에 가도 볼 수 있는 별 볼일 없는 이끼에도 수많은 종류가 있다는 것, 해마는 성전환을 한다는 것 등 책에서 만나는 생물들의 세계는 정말 신기했다. 그래서 책장이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읽었다.
이 책들은 대부분 너무 읽어서 나중에는 책장이 모두 솜처럼 포슬포슬해졌다. 책이 귀한 시골에서 자랐지만, 난 이렇게 아버지가 품팔이를 한 후 낯선 도시에서 가져온 책들을 통해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무언가 알아가는 재미를 맛봤다. 이미 책과의 지독한 사랑을 시작했던 것이다.
칠순 아버지의 책사랑은 아직도...
지난 여름휴가 때, 친정집에 가져간 책을 읽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얼마 후, 자다가 깨어 읽던 책을 찾았지만 책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 일어나셨는지 낮잠중이시던 아버지께서 내가 읽고 있던 책을 가져가 진지하게 읽고 계셨다. 어렸을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늘 보고 자랐던 그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평생을 땀과 흙투성이로 살아오신 아버지의 최종학력은 소학교 졸업. 욕심만큼 공부를 하지 못했음이 아쉽다는 이야길 자주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틈만 나면 신문이나 책을 읽으셨다. 한여름에는 농사일을 하고 들어와 점심 후 잠깐 자는 낮잠까지 쪼개어 신문이나 책을 읽곤 하셨다. 이른 새벽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신문과 책읽기는 내가 어렸던 30년 전이나 연세가 76세인 올 여름이나 이렇게 변함이 없다. 친정을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아버지 모습이다.
이렇게 우리들은 자라면서 틈날 때마다 신문과 책을 읽고 계신 아버지 모습을 날마다 보고 자랐다. 이런 우리 7남매가 모두 다른 사람들보다 책을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책을 사이에 두고 치르는 아버지와의 행복한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