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옥 한 알 속에는 풋풋한 청춘의 한 때가 숨어 있다

와삭와삭 씹어 먹어야 제 맛이 나는 홍옥, 한 입 드셔 보실래요?

등록 2006.10.27 09:22수정 2006.10.2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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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으로 느끼며 먹는 홍옥, 홍옥의 그 붉은색을 무슨 색이라고 불러야 될까요? 그냥 붉다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온몸으로 느끼며 먹는 홍옥, 홍옥의 그 붉은색을 무슨 색이라고 불러야 될까요? 그냥 붉다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이승숙
아는 언니가 얼굴이나 한번 보자며 전화를 했다. 점심때 칼국수나 한 그릇 같이 먹자고 했다. 그래서 언니 만나러 이웃 면 소재지에 나가는 길이었다.


시장터 한 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내리는 참인데, 근처에 짐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슬쩍 지나치며 보니 사과를 굵기에 따라 정리하고 있었다.

"어? 이거 홍옥이잖아. 이거 홍옥 맞죠?"
"예, 홍옥입니다. 맛 좋습니다. 맛 한번 보실래요?"


사과를 고르던 주인 내외가 목소리도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며 사과 하나를 권한다.

"이거 홍옥 맞네. 칼로 껍질 깎을 거도 없어요. 홍옥은 껍질째 먹어야 제 맛이 나요."

나는 과일 깎는 칼을 건네주는 주인 여자에게 그리 말하며 홍옥 한 알을 옷섶에다 쓱쓱 문지르고는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금방 입 안 가득 사과물이 찼다.


나는 욕심스레 사과를 한 상자나 샀다.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아주는데 보니 많기는 좀 많았다. 거의 20킬로 가까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홍옥을 언제 또 만나랴 하는 심정으로 지갑을 열고 돈을 꺼냈다.

예전 내가 어릴 때, 그때 우리 동네에는 사과 농사짓는 집이 딱 세 집 있었다. 한 집은 우리 큰집이었고, 또 한 집은 아랫마을 선생님네 집이었다. 그리고 또 한 집, 산 밑에 있는 사과밭은 '살래' 아제네 집 사과밭이었다.


그때(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는 사과 종류가 두 종류밖에 없었다. 하나는 '홍옥'이었고, 또 하나는 '국광'이었다.

홍옥은 가을 과실이었다. 가을이 되면 홍옥 나무에는 온통 새빨간 사과뿐이었다. 가지가 척척 늘어지도록 홍옥이 오지게도 달렸다. 사과밭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입 안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그 선명한 붉은색 홍옥을 보면 뿌리칠 수 없는 유혹 앞에 잠시 몸을 떨어야 했다.

국광은 겨울 과실이었다. 홍옥이 껍질도 얇고 물이 많은 데 비해, 국광은 껍질이 두꺼웠고 과육도 뻣뻣한 감이 있었다. 홍옥이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면 퍼석퍼석해지고 맛이 없어지는 데 반해, 국광은 추워져야 비로소 제 맛을 내는 과일이었다. 한겨울에 먹는 국광 사과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달콤함이었다.

어느 가을날, 우리는 모종의 모의를 했다. 한 마을에 사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짜리 가시나 여섯 명은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했다.

"있제, 살레 아제네 사과밭에 홍옥이 억수로 마이 달렸더라. 그거 진짜로 맛있겠더라."

누가 이리 말하자 금세 눈빛들이 모여지며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우리 그거 서리해 묵자. 사과 많은데 우리 좀 따 묵어도 표 안 날끼다."
"그래 그라자. 그 밭은 산 밑에 있어서 사람들도 빌로 안 온다."


며칠 뒤 우리는 사과 서리를 하러 갔다. 그날따라 가랑비가 내렸다. 가을걷이를 하던 사람들도 다 집으로 돌아가고 논밭전지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안 보였다.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 같았다.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해놓은 살래 아제네 사과밭에는 원두막 겸 창고가 있었다. 사과가 익는 철이면 주인인 살래 아제가 그곳에서 쉬면서 사과밭을 지킨다고 했다. 우리는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보았다. 원두막에선 아무 소리도 안 났다. 그래서 용기를 낸 우리들은 탱자나무가 성글게 나 있는 곳으로 몸을 들이밀고 사과밭에 들어갔다.

겁이 나서 안쪽으로는 못 가고 입구에 있는 나무에서 사과를 훑기 시작했다. 사과 무게로 척척 늘어져 있던 가지가 사과를 따자 다시 하늘로 쳐 올라갔다.

저마다 사과를 두어 개씩 훑여서 딴 우리들은 산을 향해 내달렸다. 가랑비에 젖은 앞머리가 얼굴에 척척 감겼다. 검둥 고무신도 물이 차서 미끈거렸다.

사과는 굵고 달았다. 한 입 베어 물자 온몸에 전율이 찌르르르 왔다. 단맛보다 더 강한 신맛에 부르르 몸을 떨어야 했다.

그날 저녁때부터 괜히 엄마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혹시라도 사과 서리한 이야기가 나올까봐 물어봤다. 그러나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이 되어도 동네는 조용했고 아무 소문도 들리지 않았다.

범인은 범죄현장을 꼭 다시 가본다는 말이 있다. 우리도 그랬다. 며칠 지난 어느 날, 그 밭 근처에 가서 동정을 살펴봤다. 우리가 건너간 자리에는 신발 표시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사과 서리를 한 그날 마침 비가 와서 땅이 물렁물렁해져 있었던 거다. 밭에는 우리들의 신발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살래 아제는 범인이 누군지 안 보고도 알았을 것 같았다. 진흙땅에 찍힌 신발 모양을 보면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는 몇 살쯤인지 대번 알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아제는 동네에 소문내고 추달하고 그러지 않았다. 그냥 넘어가 주었다.

우리는 아제의 그 깊은 마음까지는 헤아리지 못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게 있어서 두 번 다시 그 밭에 서리하러 가지 않았다.

퇴근한 남편이 홍옥을 보더니 반색을 한다.

"저거 홍옥 아니야? 홍옥 요새 귀하던데 어디서 구했어?"

남편은 홍옥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고는 온몸으로 홍옥의 맛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음…, 이 맛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음…, 홍옥은 말야 혀를 원시시대의 원래 상태로 돌려주는 그런 상큼한 맛이야. 인간 그 이전 상태, 우리 미각을 원래 출발점의 미각으로 돌려주는 그런 맛이야."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가게 해주는 그런 맛이란 말이지?"


나도 한 입 베어 물며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니까 말야,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100% 내 취향의 사람은 아니야. 내 가슴 속에 깊이 들어오는 그런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어느 순간 눈물이 나도록 그리운, 첫사랑 그녀 같은 그런 사과야."

우리 부부는 홍옥의 단맛을 삼키면서 대화의 감도를 높여갔다.

홍옥은 한 입 가득 베어 물어야 합니다. 와삭와삭 씹어 먹어야 제 맛이 납니다.
홍옥은 한 입 가득 베어 물어야 합니다. 와삭와삭 씹어 먹어야 제 맛이 납니다.이승숙
남편이 신맛에 눈을 찡그리며 홍옥을 바삐 씹어 삼킨다.

"홍옥을 한 입 베어 물면 바쁘게 씹어야 해. 부드럽게 여유있게 씹으면 안 돼. 그냥 마구마구 씹어야 해. 맛을 음미하면서 여유있게 씹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사과가 바로 홍옥이지. 홍옥은 바쁘게 마구마구 씹어야 해."

홍옥은 칼로 깎아서 먹기보다는 껍질째 먹어야 비로소 홍옥 본래의 맛이 나온다. 그리고 씨가 다 나오도록 사과 속까지 다 베어 먹어야 진 맛을 알 수 있다. 말로 표현 못 할 신맛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또 찾게 되는 사과가 바로 홍옥이다.

풋풋한 나이일 때는 신맛 나는 음식들을 좋아하지만 뼈가 여물고 살이 단단해지면 우리는 신맛과 멀어진다. 그러면서 우리 몸과 마음의 감각들은 점점 굳어간다. 신맛은 몸을 유연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감각까지도 부드럽게 해주는데 우리는 그런 맛을 느낄 사이도 없이 살기에 바쁘다.

생의 한 모퉁이 '어드메쯤'에는 누구나 다 그립고 아련한 한 시절들이 있었다. 어쩌다 가끔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싸아하게 저려져 오는 그런 그리움의 한 시절이 있었다. 홍옥의 맛은 바로 그런 맛이다.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저려져 오는 그런 맛이다. 단발머리를 나풀대던 첫사랑 그 소녀처럼, 간지럽고 파릇파릇한, 싱그럽던 내 젊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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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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